온기         이제

March 12 - April 18, 2014

붓춤: 황홀한 빙판, 비몽사몽, 만필漫筆

....이럴땐 결국 그림뿐.
세상은 반드시 무언가 결여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외칠 때, 그렇다면 예술도, 세상을 자궁 삼아 난 것이니 자연히, 무언가 결여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림/그리기는 세상의 삶/죽음살이 자체가 부재의 양태로 돌아가는 것임을 증명하는 일[부재증명]일이다. 궁극적으로는 그림/그리기 자신도 부재의 한 형식임을 입증한다. 기구한 팔자를 타고 난 것. 따라서 회화는 그 자궁·출처·대상인 세상에 대해 부재증명으로서의 그림/그리기이다. 또한 그럴 때에만 회화는 무엇인가를 증언하고 고백하는 것으로서의 회화이다. 그림/그리기의 실제 효용은 이런 말장난 속에서만 일어난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회화를 어느 짝에다 갖다 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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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의 <둥실>은 화가 자신의 좌표를 암시하는 그림이다. 먼저, 그림 그려온 과정을 추적해보자. 처음에 두세 번 밑칠을 한 뒤 화가는 딱히 무엇을 그리겠다는 의사 없이 그저 물감을 더 펴 발랐다. 처음에는 슥슥 널찍하게 칠하다가, 그 다음엔 더 작은 붓으로 여기저기 몇 군데를 슥 긋듯이 붓질도 하고, 어디서는 붓질 따라 물감이 두텁게 남아있을 만큼 되직이 얹기도 했다. 좀 있다가 다시 그는 대충 물감 묻힌 붓을 톡톡 찍어대거나 서너 군데에서는 그림을 짓뭉갤 듯이 붓을 찍어 돌리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심지어 붓을 휘둘러 물감을 화면에 흩뿌리기까지 한다. 그러고는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느닷없이 꼬챙이 같은 것으로 그어버린 바람에 화면에는 밑칠이 드러나게 상처가 나버렸다. 그의 광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제법 두텁게 얹어놓은 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는 다시 화면 위쪽 가운데를, 물감을 묻히지 않은 붓으로 슥슥 문질러 밑칠이 드러나게 하고는, 거기다 순식간에 발을 그려 넣는다. 그림을 마주 본 방향에서 왼발 주변에는 세로로 문질러 지운 흔적이, 오른발 주변에는 가로로 사납게 훔쳐낸 자국이 남아있다.

그렇게 해서 이 그림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향으로 읽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그렸다기보다 되레 지운 것이다. 칠하거나 긋거나 뭉개거나 문지르기. 맨 마지막엔 그 위에 생뚱맞게도 발을 그리기. 발은 그림을 딛고 서있다. 그러나 발은―그것이 손이었다면?―붓질·물감을 문질러낸 흔적 위에 그려져 있어서 ‘흔들린다.’ 발은 대지를 딛고 선 게 아니라, 마치 얼음판에 처음 발 들인 아이처럼, 미끄러진다. 2) 따라서 이 그림은 공들여 그려놓은 회화-현장을 발로 문지르고 짓뭉개고 발톱으로 긁어 훼손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발은―그것이 손이었다면 달랐을까?―화가가 애써 손으로 지어놓은 농사를 위협한다.

따라서 <둥실>은 그의 자화상이다. 이 그림에서 발은 그림-늪 또는 그림-밭으로 막 들어서고 있거나, 그림-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겨우 발을 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신나게 떠들어도 언어는 그림을 해명하지 못한다. 결국 그림은 이렇거나 저렇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 이렇지도 않고 저렇지도 않다. 화가는 세상을 화폭 안으로 초대하려 하지만, 그림은 세상을 거부한다. 세상도 그림을 조롱한다. 그림은 심지어 자신의 자궁인 화가를 물리치고 자기자신이고자 한다. 화가도 그렇지만, 그림도 제정신이 아니다. 화가가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과 고된 노동을 투여해도 그림은 항상 화가를 능가한다. 화가는 그림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의 육신은 도시에 속해 있고, 그의 마음은 도시에서 도시 일상, 도시의 순간, 도시의 공간, 도시의 사물과 도시의 사람을 만난다. 그는 도시에서 자고 도시에서 일어나고 도시를 기웃거리고 도시를 헤엄치고 도시에서 졸고 도시에서 꿈꾼다. 화가는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이다.

이를테면 <길>. 화가의 눈에 뜨인 사물―운동화. 딱히 기념할 만한 얘기도 대상도 없는 주택가를 지나던 도중 문득 화가의 마음을 찌르며 들어선 것. 풍경으로부터 얻는 상처[풍크툼]. 그는 바삐 붓을 휘둘러 캔버스 바닥을 칠하고 전신주처럼 보이는 수직 기둥을 세우고 보도블럭을 깔고 건물을 몇 채 세우고 차를 몇 대 주차하고 전봇대 아래 운동화 한 켤레를 데려다 놓는다. 그림에서 운동화는 자기 자리―누군가의 발을 보호하면서 그의 경제적 형편을 증명하는 사회적 기능―에서 ‘물러난 사물’이다. 물러난 사물은, 물러나기 전에도 그랬지만, 고독하다. 그것이 화가의 마음을 찌른다. 그러나 실재세계에 방치되어 있던 그 물러난 사물은 적어도 화가가 보기에는 사물 자신으로부터 풍경을 일으켜 세우고 풍경에 숨을 불어넣는다. 물러난 사물에 의해 풍경에는 비로소 뜨듯한 기운―“온기”―이 감돈다. 고독의 온기.

화가는 그림을 몹시 서둘러가며 그린다. 그는 불가피하게, 남송 양해梁楷(1140년경-1210년경)가 그랬듯이, 그 시공간에 속한 사물들―전봇대, 보도블럭, 자동차, 건물, 도로, 나무―의 세부를 꼼꼼하게 챙겨가며 그리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그림은 박물관이 되었을 것이고, 그림 안에 든 사물은 박물관 진열장의 고고학적 유물처럼 ‘박제’되었을 것이다. 그림 안의 모든 것은 캔버스 천의 살 안으로 파고들어 확고히 뿌리박지 못한다. 그 대신 화가는 모든 것이 캔버스 위에 떠다니도록 그렸다: 무엇보다도 그는 풍경이 마치 빙판에 잠시 머무는 듯이, ‘서둘러’ 슥슥슥 붓질해 간다. 사물들의 육신이 본래 지닌 살집과 피부 질감은 화가의 빠른 붓질 때문에 다 사라지고 마치 다시마 진물 바른 듯 미끌미끌한 표면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과 풍경의 디테일을 만날 수 없다. 풍경을 잃어버린 대신 우리가 얻은 것은 미끌미끌한 ‘그림’이다. 사물·풍경은 캔버스-빙판을 미끄러지는 이미지가 되었다. 이미지는 자신의 도상―사물임―을 잊고 빙판에서 다만 춤춘다. 화가는 사물을 캔버스-활주로에 착륙시키지 않는다/못한다. [사물 자신은 원하지 않는 바이지만, 혹은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태도이지만, 어쨌든 화가에 의하여] 사물은 연거푸 복행go-around한다. 화가의 붓춤은 복행의 궤적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부재―있음/없음 사이, 이륙/착륙 사이, 가기/오기 사이, 어제/오늘 사이, 있어짐/없어짐 사이, 사물에서 붓에 이르는 사이, 붓질 전과 후 사이, 시각적 인지와 추상화 과정 사이, 실재에서 예술 사이―가 추는 춤이다. 부재가 일으키는 파랑波浪, 부재의 얼룩, 부재의 시나위, 부재의 윤무輪舞, ...... 풍경은 부재의 풍경일 뿐이다.

결국 그림/그리기의 기원은 부재하는 사물이다. 근대-도시라는 시공간에서 사물은 오로지 자기자신을 지시한다. 또 도시는 고독한 사물이 ‘진열’되어 있는 공간이다. 사물은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어주지 않는다. 사물은 자기 내부로만 향한다. 그것은 고독하다. 화가가 거기에 도상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려 하거나 붓질을 해서 그것의 이미지를 만들어줄 때조차 사물은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물은 “’텅 빈’ 도상”이다. 그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사물이 가장 완벽하게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시점이다. 화가는 사물·대상·풍경에게 말을 걸려 하지만 서글프게도 그들은 자신의 고독과 소외를 오히려 즐긴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면, 사물은 화가가 숭배까지 해야 할지도 모를 일종의 주물呪物[fetish]이다. 하지만 섭섭하게도 사물은 화폭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사물·풍경이라는 냉혹한 페티시-세계에서 화가가/그림이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 마냥 주워섬겨도 안 되고 애써 지워버려도 안 되는, 아니 뭐 이런 놈의 ‘세계’가 다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도 사물·풍경과 그림/그리기 사이에서 화가는 약자이다. 사물·풍경은 자꾸 달아나고 그림은 언제나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물·풍경의 고독에 화가·그림·예술이 가닿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눈깔을 부릅뜨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물에게서 새어나오는 기운을 무심결에 느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끝끝내 고독한 것은 화가/그림/예술이다. 고독함은 자신의 위치/존재를 증명하기 어려울 때 생기는, 일종의 부재 상황이다. 그림자에 대해 빛이 그렇고 밤에 대해 낮이 그러하며, 예술에 대해 일상세계가 또한 그렇다; 엄마에 대해 아버지도 그렇고, 사물에 대해 사람이 또 그렇고, 인간에 대해 자연도 마찬가지이다. “폐쇄된 자기애가 아니라 관계의 심원함 속에서 자신을 보는 것” 또는 “리얼한 지각”에 대한 요청이 커질수록 얄궂게도 고독/부재의 심도도 그만큼 깊어진다. 그러나 절망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 무시무시한 고독에 육접肉接하는 일은 인드라 그물로 나아가는 내적 조건이요 윤리적 요청이다.

이러한 문제를 직감해서인지 화가는 사물/그림에게 정교한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어디선가 와서, 잠깐, 도깨비처럼 얼핏 나타났다가는, 어디론가 다시 흘러갈 것이다. 화가는 그렇게 하도록/되도록 내버려둔다. 그 대신 그는 다른 감각에 좀 더 기댄다: 어떤 낌새, 즉 “어딘가로부터 온 에너지가 인간으로 사물로 그 주변으로 머무르고 옮겨지면서 형성되는 온기” 같은 것. 그는 ‘대충’ 그리면서 다만 붓춤을 춘다. 예를 들어 그림 안의 모든 것이 어울려 춤추는 <퇴근>을 보자. 그림 아래를 포장도로가 길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홍수처럼 바삐 거세게 흐르고, 거기 질세라 왼쪽에서 들이닥친 전선은 전봇대에 세게 부딪쳐 가로등을 눈이 시리도록 밝히다 못해 전봇대 아래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는, 그러고도 힘이 넘쳐 다시 담장을 타고 넘어 울타리 안쪽 나무들을 흔들어 깨운다. 그렇게 한바탕 요란 떨고 나자 다시 오른쪽으로 허공중 빗금처럼 유유히 사라진다. 그런가 하면 밤구름은 흐느적거리며 달 주위에서 치근덕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쪽 골목길을 서툴게 궤적을 그리며 나온 한 사람은 가장 무심한 정물처럼 그림 오른쪽으로 빠져나갈 참이다. 그림에 기어든 모든 것 가운데 오직 달만이 눈을 똥그랗게 뜬 채 정물-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랜다.

그의 그림에서 사물은 무언가를 대변하거나 의미하지 않아도 된다. 사물은 그의 그림에 도깨비처럼 들어가 있고, 자유롭다. 거기서 사물은 자기 자신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의 온기를 아주 천천히, 누구도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치 옅은 안개처럼, 피어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그림/그리기 안에서 또 바깥에서, 가설假設한다. 어찌되었든, 이래저래 사물만 자유롭고 사물만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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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붓질을 따라다니다 보니, 대상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붓질이 더 거칠어지면서 그림에 촉각과 질감이 더욱 뚜렷하고 두터워져왔다. 붓질과 호흡이 거칠수록 화가는, 딴딴하게 스스로를 안으로 접어 넣은 사물의 폐부 깊숙한 곳까지 화가 자신의 숨을 불어넣어, 기어이 사물로 하여금 날숨을 토해내게 만드는 듯하다. 그랬을 때 그의 거친 호흡과 붓질은 “미지근하지만 / 깊고 / 풍부한 / 포옹”으로 대상에 육접하고 서로 온기를 나누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사물 쪽에서 옅은 안개처럼 피워 올리는 온기를 감지해야 하는, 그런 차원이다. 그러한 일은, 눈깔을 닫고 배때기를 땅에다 깔고 지렁이처럼 기어 다녀야 겨우 있어질까말까 한, 희한한 사태이다. 땅강아지나 소똥구리처럼, 홀딱 벗은 육신을 지상-늪에 바지런히 굴리고 다녀야 귓구멍과 콧구멍·땀구멍이 열려 그 사이로 새어드는 냄새와 소리, 신비스런 감촉을 통해 세속미물의 성음을 그제사 희미하게 짐작하게 되는, 그만큼이나 희한한 사태이다. 이것이 최민이 이제의 지난 번 개인전 서문에서 짚어낸 “에로틱”함, “온몸의 촉감”과 관련된 지점이며, 또 “살짝 미친 상태”를 이어가는 하나의 선일 것이다.

김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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