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ces to whole        김영애

February 16 - February 28, 2016

인류는 오래 전부터 작은 조각들로 이미지나 패턴을 만들어 왔다. 그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사용한 재료들도 참으로 다양하다. 고대 로마와 비잔틴의 모자이크나 고딕의 스테인드글라스, 이슬람의 타일 그리고 중세 이후로 여인들이 가정에서 만들기 시작한 퀼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렇듯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수 없이 많은 piecemaker들이 있어 왔다. 그리고 나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 10여년 나무 조각들을 자르고 붙이는 작업을 해왔다. 이 작업은 오래된 가옥에서 뜯어낸 쪼개지고 칠이 벗겨진 그리고 못이나 톱 자국이 남겨진 목재들에 매료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을 통해 삶과 세월의 흔적- 그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영속성에 관하여 질문을 던져왔다 하지만 작업의 본거지를 한국으로 옮기고부터 뉴질랜드와 달리 건축물 폐자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불어 닥친 빈티지 열풍으로 중국에서 날조된 그 세월의 흔적들이 여기 저기 널려 상품으로 팔리게 되었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새로운 모색이 필요했다. 스텐실이나 실크 스크린을 사용하여 나무에 패턴이나 질감을 넣는 일은 이렇듯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흠모와 질투의 마음으로 봐오던 우리의 전통조각보나 흑인 노예 여성들에게서 시작된 Gee's Bend 퀼트를 흉내라도 내보고자 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조선의 규방에서 혹은 알리바마 강변 마을의 움막에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 조각을 자르고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던 그 여인들이 나의 스승이 되었다. 그들은 나에게 탁월한 미적 감각뿐만 아니라 인내와 근면이라는 미덕으로도 가르침을 주었다. 한정된 재료로도 그토록 아름다운 작품들을 탄생시킨 그들과 감히 비교도 할 수도 없겠지만 다행히 섬유와는 다른 물성을 지닌 나무를 재료로 사용한 까닭에 나의 작품은 그들의 퀼트하고는 많이 다르다.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를 이루었다는 것 말고는…


나는 작은 것의 힘을 믿는다. 그 작은 것들이 모여 무리를 이루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 한 송이 한 송이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어 풍경의 색채를 바꿔버린 것에 누구나 감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또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합창이나 제각기 다른 소리들을 내는 악기들이 만들어 내는 교향곡은 어떠한가..
그런 것들에 비하면 나의 작품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체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소망에 '화합과 공존'이라는 이 시대에 절실한 메시지가 조금이나마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보태고 싶다.


Pieces to Whole_김영애



부분들이 만드는 무명의 영토_ 이선영(미술평론가)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김영애의 최근 전시 ‘pieces to whole’은 전시부제 그대로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는 전체의 세계이다. 부분은 전체의 일부이긴 하지만, 구상적 이미지가 없는 김영애의 작품에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유기적이지 않다. 사각형은 규모만 다를 뿐인 또 다른 사각형을 만들 뿐이다. 또 다른 부분은 부분의 옆에서 파생한다. 구성요소들이 가로줄 또는 세로줄을 맞춰, 또는 조각보같은 형식으로 붙어있기는 하지만, 무슨 조립품처럼 일사 분란한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서 융통성 있게 조합된 요소들 사이의 틈, 즉 시공간적 간격은 완전히 감춰지지 않는다. 틈은 또 다른 무늬가 되어 작품의 몸체를 이룬다. 버려진 물건이나 재료들을 그러모아 직삼각형, 직사각형 등으로 잘라 맞춘 전체는 그 부분들이 비롯되었을 원래의 판도 자투리도 아닌 또 다른 무엇으로 환생한다. 폐기물에서 예술로 변화하는 순간은 양이 질로 전화하는 순간과 겹쳐진다. 


한편 예술이란 본래 어디에 쓰이는 것이 아니기에 동일한 계열로 이동한 것일 수도 있다. 조각난 것들을 잇는 행위는 단지 작업의 방법론을 넘어서 삶에 대한 비유로 확장된다. 그 조각들은 통으로 주어진 시공간과 물질이 아니다. 새것을 잘라 쓰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을 가다듬어 사용하는 것이다. 작품의 구성요소들은 세로로 길쭉하거나 가로로 길쭉하거나 비슷한 모양새를 가지지만 똑같은 크기도 형태도 색깔도 가지지 않는다. 그 조각들이 새것이라면, 상품으로 표준화 되고 가격도 매겨져 있을 것이다. 작품 재료가 아니더라도, 전적인 새것은 그 자체를 취득하는 것부터가 경쟁의 연속이다. 그러한 새것들을 소비하는 것은 교육부터 시작하여 대부분 코드화, 상품화되어있는 인생 여정을 지배한다. 그러한 소비는 지루한 노동을 감내케 한다. 정작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모른 채 새것, 즉 좋은 것을 먼저 취하려는 경쟁으로 점철되는 것이 대부분의 인생이며, 삶의 일부 인 예술 또한 비슷하다.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 정작 작가적 본질을 내팽개치는 일 따위는 흔히 일어난다. 도구적 합리성만이 투명하게 빛나고, 인간 또한 소비자 또는 생산자로서 그러한 체계의 논리에 복속된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되고 결정되어 소비만을 기다리는 그러한 전체를 취하기 위한 레드 오션에서의 경쟁을 포기하고 나면, 나머지들이 보인다. 김영애는 그 나머지들의 블루 오션에서 보석들을 건졌다. 보통 나머지들은 어디에 쓰여야 하는지 모호하다. 이윤을 위해 빈틈없이 체계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애매한 것들의 위상은 낮다. 그런 것은 억압되거나 폐기된다.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김영애의 작업은 어디에 쓰일지 모를 이 나머지 것들을 수집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제각각의 기원을 가진 작품 속 부분들은 불투명하다. 작품이 형성되는 나름의 규칙은 있지만 최종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모호한 부분들은 즐거운 또는 고뇌에 찬 방황 속에서 역전될 기회를 노린다. 그자체로 쓸모 있는 것은 없듯이 그자체로 쓸모없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맥락의 문제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것은 잡다한 재료들이 아니라, 양질전화를 일으키는 적절한 맥락의 부여이다. 그녀의 작품은 단편들로부터 왔지만, 단편들로 흩어지지는 않는다. 단편들은 또 다른 전체를 형성한 것이다. 그러한 조각들은 삶의 시공간과도 비교되며 그로부터 비롯된 생각이나 느낌과 연결된다. 즉 그것들은 낭비된 것, 쓸모없다고 여겨져 버려진 것, 후회되는 것 등과 비교될 수 있다. 김영애의 작품 속에서 이 무명의 것들은 회귀하여 또 다른 영토를 만든다. 그래서 자신들이 떠나온 전체와도 도달할 전체(뚜렷한 목표와 기능을 가진다는 의미에서)도 아닌, 또 다른 전체를 향하여 각자의 어깨와 키를 맞추는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모자이크나 타일, 퀼트같은 오래된 장식-예술의 전통과 연결 짓는다. 


근대에서야 제도로서 확립된 순수예술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된 전통을 가지는, 조각들을 이어서 뭔가 만드는 이(piecemaker)의 계열에 건축폐자재를 활용한 이가 추가되었다. 김영애의 작품이 발하는 색감과 질감은 독특한 재료의 선택과 가공에 힘입은 바 크다. 한국에서 그림을 전공했지만, 30대 중반 뉴질랜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6년간 판화를 다시 전공하면서 그리기 보다는 제작에 방점을 찍는 선회가 이루어졌다. 작가는 지난 10 여 년 간 삶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건축 폐자재를 지르고 붙이는 작업을 해왔다. 최근 작업에는 상업화로 흔해진 ‘빈티지 스타일’을 벗어나기 위해 스텐실이나 실크 스크린을 사용하여 나무에 패턴이나 질감을 넣기도 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 [Sewn to Sawn](2016)이 특히 그러하듯이 작은 조각들을 이어 만든 김영애의 작품들은 조각 잇기라는 비슷한 방법론으로 제작된 조각보를 떠올린다.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있던 터라 작가의 무의식 속에 깊이 숨겨져 있었을 한국의 장식예술이 재 발굴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천과 나무는 물성이 다르고, 헤쳐 모이는 방식 또한 다르다. 톱질, 망치질, 대패질 등, 목수가 하는 일을 모두 해야 하는 김영애의 작업은 아기자기한 규방의 공예와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목수의 작업과도 다른 부분은 작가가 주재료인 판자를 자를 때 칼로 자르기도 하고 금을 그은 후 쪼개기도 하고 자른 다면이 거칠게 나오게 배열하기도 하면서 독특한 질감을 생성하는 것에 있다. 대략의 계획은 잡혀있지만, 재료 선택 및 가공에 있어서 우연적 요소에 개방한다는 점에서 예술적이다. 물론 수집될 수 없는 것은 만들어서 끼워 넣는다. 낡아 보이는 것이 상품으로 개발되자 새로 만들고 그려 넣는 과정 또한 중요해 졌다. 그러나 새로 만들거나 그리는 것 또한 ‘본체’처럼 조각이 나 있다. 그것이 만약 기호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기호는 파편화되어 있다. 


거친 제작 과정을 감수하고 즐기는 작가에게 그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발상과 의미는 중요하다. 김영애의 작품에서 공예적인 부분은 전체의 일부에 속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추상적 관념이나 기능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순수예술도 공예도 아니다. 천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부조적이며, 그 결과물 뚜한 건축적(벽, 바닥)인 느낌이 강하다. 그것은 주재료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고, 평면이라는 회화의 조건을 의식하는 현대미술의 전통과 관계되는 것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회화과를 다녔지만 그리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는다는 작가에게, 그림이란 무엇이어야 한다는 관념보다는 경험의 비중이 더욱 컸을 것이다. 뉴질랜드에서의 미대 진학은 제 2막이었지 1막의 연속은 아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에서, 더 이전 삶으로의 회귀가 진정한 전진을 낳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집수리를 하면 옆에서 곧잘 조수 역할도 잘 했다는—그 밖에 작가는 때 색색으로 쌓여 있는 옷이나 한복 천, 실타래, 옷의 무늬 등에 매료되곤 했다고 말한다—김영애의 작품에서 편재하는 것은 집의 이미지이다. 



그녀의 작업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집을 다시 짓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세로줄을 맞춰서 줄지어 붙인 나무들이 무채색의 계열로 펼쳐지는 이전의 작품 [white construction](2007), [gray construction](2010), [gradation in grey](2010)는 삶의 흔적들을 묵묵히 받아내고 지켜본 오래된 바닥이나 벽을 떠올린다. 작품 [무제](2005)처럼 건축용 금속 주형들을 코튼 펄프로 캐스팅한 작품도 있다. 이러한 주형들은 마치 하나의 모듈처럼 작용하여 또 다른 문, 창문, 또는 벽으로 증식되곤 한다. 작가는 사라져가는 것들에게 기념비적인 형상을 부여한다. 주로 무채색으로 염색한 작품들은 오래된 것, 버려진 것, 망각된 것, 기억 된 것 등을 연상시킨다. 2000년대 초반, 재료의 질감이 살아있는 콜라그래프 프린트 작품들에는 뾰족한 지붕과 입구가 있는 집의 실루엣이 명확하게 남아있다. 그러한 작품들은 집이 자아의 공간이자 여성의 공간임을 알려준다. 


동시에 그러한 공간에 남겨진 시간의 흔적들, 즉 금간 것, 칠이 벗겨진 것, 닳은 것, 각종 구멍과 잘린 자국은 단순한 ‘빈티지 무늬’를 넘어서 삶의 무늬로 거듭난다. 김영애에게 건축 폐자재는 단지 소재로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 소재가 눈에 띈 작가의 상황이 중요한 것 아닐까. 거기에는 이주자로서의 자의식이 있다. 이주의 과정은 많은 것을 버리며, 때로 버려진 것을 다시 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발전지상주의적인 한국 같으면 쓰레기하치장으로 직행할 것들이 뉴질랜드에서는 또 다른 유통 경로를 거친다는 점이 작가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한국에 다시 정착한 작가에게 그러한 재료들이 귀한 한국에서의 작업은 또다른 도전과 변화를 야기했다. 작가는 뉴질랜드의 건축 폐자재를 파는 가게에서 구해온 목재, 타일, 슬레이트 등을 잘라 사용하고, 재료들을 라텍스로 몰드를 만들어 코튼 펄프로 떠내기도 한다. 건축 자재로 만든 펄프 캐스팅 작품들 역시 조각 잇기 작업만큼이나 반복과 차이의 유희를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 조각을 시도해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3차원 공간에 서있는 입체는 회화보다 환영적 속성이 덜하다. 김영애의 작품은 자체의 물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평면적인 것에 내재된 환영의 속성 또한 중요하기에 입체작업은 다소간 머뭇거려질 수도 있다. 가령 이전의 작품 [horizontal construction](2010)을 보면, 수평선처럼 가로로 긴 나무쪽들이 만들어내는 평면이 마치 노을 진 하늘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에서 취해온 물질로 구성된 작품이면서 환영(illusion)이 감지된다는 점은 특이하고 역설적이다. 미술사에서 구성주의자들은 환영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미술적 현실의 건설, 즉 ‘실재하는 하나의 공간 속에 실재하는 재료들’(타틀린)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Blue Construction](2015)같은 작품을 보면, 작가는 재료 자체가 줄 수 있는 질감의 최대치를 활용한다. 그러한 방식은 재료의 즉물성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실재의 세계와 똑같은 리얼리티를 갖는 자율적 대상을 지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작가는 어떤 재료 및 그 가공방식에서 나올 수 있는 결과를 물신화하지는 않는다. 재료와 제작방식의 물신화가 한국의 일부 추상미술처럼 또 다른 공예품을 낳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특정한 질감과 작가의 감수성에 의해 잘 조율된 색채를 입은 평면은 화면의 평면성이나 절대 순수와 같은 전형적인 추상미술의 미학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김영애의 작품은 구상적이지 않지만, 재료나 제작방식에서 야기된 촉각성은 순수한 시각성에 함몰되지 않는다. 조각들을 이어붙이는 구성, 또는 꼴라주의 방식은 입체파가 성취했듯이 ‘손으로 만져질 듯 한 공간’(브라크)을 만들어 낸다. 브라크는 이러한 촉감적 공간을 ‘수공적(manual) 공간’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피카소와 함께 한 짧은 입체파의 실험에서 그러한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잘게 분할된 각진 면들(facet)의 배열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온 여러 크기의 소각면들은 김영애의 작품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다만 입체파와 달리 재현적 요소가 없는 작품들에서 소각면들은 수직이나 수평, 또는 대각선의 구성을 따른다. 


입체파는 세잔으로부터 시작된 추상적 평면을 향한 거대한 일보를 내디뎠지만, 현대의 작가는 그 평면으로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 평면으로부터 구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구성이란 추상 이후의 과정이다. 그리고 구성이 충분히 진행되었을 때 해체도 동시에 진행된다. 여기에서 해체는 구성주의에 남아있는 유기적 관계의 해체를 말한다. 가령 김영애의 작품 속 부분들은 어떤 부분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도 같은 균질화는 아니지만, 부분들은 미묘한 차이만을 남긴 채 각자의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이러한 해체가 진정한 민주주의다. 현대철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한 흐름에 의하면, 유기적 질서는 늘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을 구별하고, 차이는 차별이 되곤 하기에 해체되어 마땅하다. 해체는 언어를 다루는 예술이 할 수 있는 정치적인 행위이다. 명상 또한 해체를 지향한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욕심을 만들어내는 고리들을 끊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김영애의 작품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모노톤의 색조들은 차분하고 명상적인 느낌을 준다.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전체는 가로로 길거나 세로로 길거나 정방형을 이루면서 미묘한 차이의 계열을 만든다. 색색의 모래알로 그려진 만다라가 나중에는 한데 섞이듯이, 모노톤의 작품들에도 여러 색이 잠재해 있으며 최근 작품에는 글자나 도형의 일부 같은 모습으로 발랄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나무쪽들을 맞춰서 모자이크처럼 배열한 면들은 연속성만큼이나 불연속성을 가진다. 작품 제목에 포함된 구성이라는 방식이 그렇다. 이번 전시에서 [Yellow Construction], [Blue Construction](2015)로 붙여진 작품들은 나무 조각들 사이로 어떤 전체의 일부인지 확인이 안 되는 색선들이 들고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10점 넘게 출품된 [Sewn to Sawn](2015) 시리즈는 ‘톱으로 잘라서’, ‘꿰매어 붙이는’ 방식을 작품 제목으로도 표현했다. 



목재에 아크릴로 채색한 [Sewn to Sawn](2015) 시리즈는 두 개의 삼각형이 대각선으로 마주해서 만든 정사각형들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대각선의 방향은 제각각이어서 독특한 리듬과 박자를 형성한다. 그 사이를 불규칙적으로 들고나는 직선 또는 곡선의 색선들은 하모니를 이루며, 차분한 색조의 평면 가운데에서 활기를 자아낸다. 모노톤의 평면들 틈사이로 부유물처럼 솟아오르는 또 다른 색의 흔적들은 망각과 기억의 역학 관계를 보여준다. 버려진 것들을 수집하고, 그 표면의 낡고 긁힌 자국들을 도드라지게 하거나 변형시키며, 이어진 조각들만큼이나 이어진 조각들 사이의 틈 또한 강조하는 김영애의 작품은 망각과 기억이 동전의 양면처럼 상보적임을 알려준다. 망각은 기억의 어떤 측면이며, 그 역도 성립된다. 폐자재에서 풍기는 폐허의 느낌은 우선 망각에 가깝다. 눈과 마음을 가라앉히는 무채색 톤의 바탕 면 또한 활활 타올랐다가 남은 재나 상실의 자리 등을 떠올린다. 


빈 집에서 되울려오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무엇인가 있었던 자리에는 공백이 느껴진다. 그 자리에 무엇인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언어 그자체가 그러하듯이 부재를 나타내는 기호이리라. 김영애의 작품에서 그러한 부재기호는 잘린 재료 위에 잘린 형상으로 자리하곤 한다. 무엇인가를 주워와 그것이 애초에 속했던 전체와 다른 전체를 구성할 때, 어떤 흔적은 강조되고 어떤 흔적은 덮일 것이다. 어쨌든 작가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tabula rasa)로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은 덮고 어떤 것은 드러내는 과정은 다시 쓰기에 해당한다. 덮는 것은 망각이고, 드러내는 것은 기억일 것이다. 파괴를 통한 창조를 추구했던 근대는 기억보다는 망각을 택했다. 그것은 근대 이전의 전통사회가 기억을 통해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선택이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근대적 주체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하랄트 바인리히는 [망각의 강 레테]에서 [파우스트]의 등장인물 메피스토텔레스의 망각술에서는 새로움에 대한 유혹의 소리가 들려온다고 말한다. 악마의 생각으로는 파우스트 박사를 망각에 이르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미끼는 언제나 새로운 것,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혁신이었다는 것이다. 김영애의 작품도 공유하는 추상미술은 그러한 새로움의 신화에 의해 강하게 추동되었다. 구상성이 없는 차분한 모노톤의 평면은 추상미술의 어법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근대적 파토스에 충전한 새로움보다는 오래됨, 망각보다는 기억이 강조된다. 현대성 자체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주의적 환원에 의해 앞을 향한 새로움만 강조되었던 것이다. 문예사조사는 모더니즘이 현대적인 도시의 초라한 모습 속에 담겨있는 시적인 가능성을 살린 보들레르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한다. 


보들레르는 시인이긴 했지만 당대의 화가들과 교류가 활발했으며, 그가 정의하고 시작한 모더니즘은 미술에서도 유효하다. 그 시학은 또한 ‘남루한 현실주의적인 것을 환상적인 것과 결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엘리어트)이었다. 보들레르는 ‘현대는 덧없는 것, 사라지는 것, 우연적인 것이다. 이것이 예술의 반을 차지하며, 다른 반쪽은 영원한 것,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현실과 영원의 이와 같은 직접적 교류를 통해서 현대는 비록 과도기적 성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지만, 비루한 평범성은 떨쳐버린다는 것이다. 보들레르가 말한 ‘하찮은 삶’이 현대성을 만든다. 모더니스트들은 현재적 삶의 잠정적이고 덧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근대적 감수성에 의해서 평범한 일상도 거리낌 없이 예술의 소재이자 주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모더니즘은 일견 고풍스러워 보이는 낭만주의까지도 소급될 수 있다. 낭만적인 방랑자의 여정은 ‘오브제’라고 명명된 사물의 수집에 유리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현대적 삶에서 툭 불거져 나온 넝마들은 입체파의 꼴라주와 초현실주의의 발견된 오브제를 거쳐 미니멀리즘의 사물성에 이르기까지 현대미학의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가 되었다. 분업화, 전문화를 통해 예술의 자율성, 고급문화로서의 순수예술이 확립된 것이 근대였다면, 생성기 근대는 아직 모순이 공존했던 원초적 활기로 충만했다. 전통, 대중성, 일상성 등이 복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앞을 향한 진보와 새로움만을 강조했던 근대성의 한축을 생성기의 모더니즘에 선명했던 상반되는 것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복귀시킨다. 김영애의 작품에서 새로움이 있다면 오래된 것을 재 맥락화(구성) 시킴에서 오는 새로움, 거기에 전무후무한 원점과도 같은 망각이 있다면 기억을 통한 망각이 있다. 모더니즘적 추상이 그토록 배제하려 했던 장식성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미술이 순수해지기 위해서 목적과 기능을 가지는, 더구나 노동의 흔적이 확연한 공예는 사라지거나 최소한 그 성격을 달리해야 했다. 


근대의 많은 공예가들이 모더니즘을 확립하고 전파하는데 기여했고, 또 많은 미술가들이 근대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기에, 더욱 더 양자는 구별 돼야만 했을 것이다. 김영애의 작품 속 장식적 요소는 노동이나 제작, 여성적인 것도 함께 들여오게 한다. 그것들은 모더니즘이 시각성(정신성)이라는 자기 동일성을 확립하기 위해 격하되어야만 했던 타자들이다. 김영애의 작품에는 모더니즘에서 억압된 것들이 하나하나 회귀하지만,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처럼 어지럽거나 복잡하지는 않다. 진보를 위한 새로운 출발에서 배제되었던 것들의 회귀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무의식이다. 그것은 작가가 지나간 것들의 흔적을 중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상징적으로 집이 자아와 여성의 공간이기도 하다면, 거기에 남겨진 흔적들이란 치유를 위해 드러내야 하기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위해 억압하기도 해야 하는 것들이다. 



하랄트 바인리히는 프로이트가 ‘지속적 흔적’을 무의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은 망각(망각된 것)이다. 무의식이란 이전에 한 번 알았던 것으로, 지금 잊혀지기는 했지만, 세상에서 사라지지는 않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여전히 영혼의 잠재적 층을 이루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기본 정리대로, 영혼의 삶에서는 아무것도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물리적이든, 쌓여있는 먼지를 털어내면 또 다른 흔적이 드러나고, 흔적은 또 다른 층으로 뒤엎일 수 있을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 억압된 것, 즉 무의식은 복귀한다. 대개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 그러나 예술은 이러한 우연은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꿈과 비슷하지만, 꿈 그 자체는 아니다. 하랄트 바인리히는 프로이트의 독창적인 발견을, 억압되어 잊혀 진 것이 바로 사라지거나 해결되지 않고 무의식이 되어 계속 작용하고 움직이고 동요하면서 영혼에 겁을 준다고 가정하는데 있다고 본다. 


김영애의 작업은 의도치 않게 버려져 잊혀 진 것들을 호출한다. 그리고 반복한다. 물론 그녀에게 있어서 기억은 어떤 특정한 사건의 재현이 아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상황에서 기억에 요구되는 것은 상상력이다. [망각의 강 레테]는 고대의 기억술이 구체성과 생생함의 기술이라고 지적한다. 그 규칙의 요구는 추상적인 것은 모두 구체적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구체적인 것이나 구체화된 것은 모두 이미지로 옮기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억술은 철저한 이미지의 기술이다. 김영애에게 이미지의 기술로서의 기억(또는 그 이면인 망각)은 재현주의에 호소하지 않는다. 재료의 수집과 제작에 있어서 우연적 요소를 충분히 활용하는 작품들에서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수렴하는 재현의 체계는 산산이 조각날 수밖에 없다. 조각은 조각으로 흩어지지 않고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는다. 조각과 조각 사이의 틈, 때로 그 틈새의 심연에서 출몰하는 이질성은 예기치 못한 것을 드러낸다. 


이성과 의식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던 이질성은 인간의 무의식 뿐 아니라 몸을 관류하는 충동이나 욕망에도 선명하다. 부분 부분의 조각들로 이어진 작품들은 대개 벽에 붙어 있는 추상적인 평면작품들이지만, 한 순간에 그 진의가 명료하게 드러나는 투명한 현전의 순간보다는, 반복적으로 되읽히며 지속하는 현존의 감각을 보유한다. 명상이나 수행을 특징짓는 것도 그러한 지속의 감각이다. 그러한 감각은 현대예술에서의 퍼포먼스나 몽환적인 하위문화에서 발견된다. 모더니즘의 물마루가 되었던 미니멀리즘 역시 시간적 요소와 그 시간에 대한 몸의 지각을 중시한다. 김영애의 작품 또한 기억과 망각, 수집과 제작이라는 시간적 행위에 근거한다. 인생과 비교하자면 사건의 발생과 해결, 상처와 치유의 과정 또한 시간만이 결정적이다. 기존 재료를 가공한 요소로 만들어지는 구성이라는 방식은 연속된 시간을 단절시키기도 하고, 단절된 시간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단절은 상처를 주는 폭력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계기가 된다. 


30대 중반에 머나먼 타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던 김영애의 삶에는 그러한 단절과 도약이 있다. 연속 또는 단절되는 시간의 파도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가에 따라 삶과 예술의 무늬는 달라질 것이다. 무엇으로 결과 될지 알 수 없는 제작과정에의 끝없는 몰두가 만들어내는 산물 역시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알라이다 아스만이 [기억의 공간]에서 말하듯이, 인간은 시간을 넘어서는 기호체계를 고안하지는 못한다. 저자는 숫자와 문자 같은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보편적인 소통체계의 예를 들었다. 예술작품은 말할 것도 없다. 예술 또한 미래에는 아니 지금 현재에도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상형 문자가 될지 모른다는 체념어린 인식은 억압된 타자들이 회귀하는 탈근대적 감수성과 교차된다. 투명하고 보편적 언어를 향한 근대적 파토스가 상대화되는 시점에서 오래된 것, 흔적들, 수수께끼 같은 단편들이 떠도는 김영애의 구성이자 해체인 작품들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실재의 감각으로 충전되어 있다. 단편들은 또 다른 전체가 되기에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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