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현         반상변이

July 2 - July 13, 2014

B-variation 189, 방안지에 잉크, 79x54.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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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바이러스, 바둑



괴물, 바이러스, 바둑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 같지만 이승현의 작품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그 이미지들은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 19줄이 그려진 종이 위에 자리 잡는다.
바둑을 두는 과정을 기록한 기보를 보고 무작위적 연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승현의 작품들은 기괴하지만 그럴 듯한 설득력을 가진다.
바둑은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하고 흥미로운 게임이다. 외견상으로는 논리적이고 명료한 선택에 의해 한 수 한 수가 두어지고 그 결과 돌들이 살고, 죽고 ,집을 짓고, 부수고 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러나 판 위에 놓인 돌로 표상되는 바둑의 배후에는 온갖 전략, 전술과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다. 바둑의 흔한 격언인 사소취대 捨小取大, 아생연후살타 我生然後殺他, 기자쟁선 棄子爭先, 도남의재북 圖南意在北 따위는 바둑이 장기, 체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축소판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승현의 이미지들은 바둑을 그대로 따오거나 복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의미도 없다. 그는 단지 바둑이라는 오래된 게임에서 이미지화를 촉발 받을 뿐이다. 그가 보는 기보들은 천재기사 오청원과 기다니 미노루의 치수 고치기 십번기에서 이세돌과 구리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최근 십번기에 이른다. 고백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실제 바둑 실력은 초보자에 가깝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수를 실제 바둑판에 놓아보고, 그에 따라 이미지를 그리고, 사석을 따로 그리고 하는 과정은 일종의 몽상적 이미지에 가까운 그의 작업들을 현실과 마주치고 만나게 하려는 과정의 일부이다. 그의 명화 패러디 작업이나 다른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이승현이 그리는 이미지는 괴물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괴물은 고질라나, 용, 프랑켄슈타인, 히드라, 에일리언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괴물의 계보와, 역사, 의미는 그리 간단치 않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대체로 오랜 역사를 가진 괴물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고, 모르고 있는 자연과 우주의 어떤 힘에 대한 상징이라고 본다. 자연이 가진 힘의 밝은 측면은 대체로 신으로 형상화 된다. 신들은 인간과 소통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자연의 측면이라면 괴물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며 소통 불가능한 쪽에 가깝다.

괴물들은 주로 인간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동굴, 심해, 산속, 무덤, 지옥, 외딴 섬 등에 서식한다. 그 형상은 대체로 다양한 동물들의 공포, 혐오스러운 모습을 집대성하거나 기형적 인간의 모습과 결합된다. 대부분 인간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며 인간에게 제물을 받치도록 요구하거나, 잡아먹고 궁극적으로 지배하려든다. 형태와 습성이 무엇이든 괴물들은 문자 그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그리고 괴물들은 시대에 따라 그 서식지와 형태 등이 바뀐다.

오늘날 대중문화에 주로 등장하는 괴물들은 우주 어딘가에 서식하는 외계생물이거나 인간이 저지른 환경오염에 의해 변형된 인간이나 동물들이다. 고질라, 에일리언, 수퍼 맨등의 만화 속의 영웅들과 문어를 닮은 외계인, 엑스 맨과 같은 돌연변이 인간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근현대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괴물의 한 종류가 바로 이승현이 그리는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체와 미생물이다. 이 괴물들은 실제로 존재하면서도 인간의 맨눈에는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괴물의 지위를 획득한다. 예를 들자면 항생제 내성 바이러스, 에이즈, 에볼라, 사스, 인플루엔자.... 등등은 현실 세계에 실재하며, 인간의 내부에 서식해 인간을 병들게 하고 죽인다. 그리고 그에 따른 공포는 일상적이다. 이 공포의 일상성은 인간들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다.

일상적 공포 혹은 삶의 일부가 된 바이러스성 괴물은 전염력을 가지고 있다. 전염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을 경계하고 만들고 무엇보다 인간 자신이 괴물이자 숙주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최근에 벌어진 세월호 침몰이나 그 이후 우리 사회의 연속된 재앙과 그에 대한 대응들을 보면 진짜 괴물이란 인간 내부에 있고, 인간이란 종족은 가망이 없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 만화가 이와아끼의 걸작 만화 <기생수>에 나오는 대사인 <여러 가지를 생각해봐도 인간이 가장 악마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악마는 모든 괴물의 정수를 모은 것이니까.
이승현을 비롯한 몇 작가들이 그리는 괴물의 세계를 간단히 특이한 취향이나 경향으로 취급해버리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 작가들은 대개 삼, 사십 대이다. 우리 미술계에 없던 괴물이 등장한 배경에는 개인적 발언이 허용되는 미술계의 분위기와 대중문화의 영향 등이 없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시대가 괴물의 시대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이승현의 그림, 이미지들이 빚지고 있는 또 다른 한 축은 초현실주의적인 자동기술법이다. 물론 초현실주의자들의 그것과 그의 방법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무엇을 그릴 것일지 결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손과 마음이 가는대로 그린다고 말한다. 일종의 의식적 자동기술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기법은 초현실주의와 유사성이 있다. 초현실주의는 아시다시피 인간의 상상력을 수퍼 에고 따위의 억압에서 해방 시키는데 있다. 그래야만 억압되지 않은 진정한 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이승현의 작업은 무작위적으로 일종의 증식을 계속해 나간다. 허물어질 건물, 까페의 유리창과 벽, 캔버스, 종이 등을 숙주 삼아 식물적 특성과 동물적 특성이 결합되어 퍼진다. 때문에 이미지들은 완결된 형태라기보다는 늘 미완의 상태에 있다. 마치 바이러스들이 수시로 자신을 변형해 환경에 적응하듯이. 이승현의 지난 작업에서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주위의 환경과 그의 드로잉이 결합될 때이다. 물론 그 결합은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려질 때 보다 흥미를 끈다. 즉 이미지의 서식지가 구체적인 사물과 공간일 때, 다시 말해 현실과 마주쳐 만날 때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아주 개인적인 코멘트를 하자면 그의 작업실에서 눈길이 가는 것 중 하나는 오래 된 의자와 사물들 위에 그려진 드로잉들이었다. 작가는 본격적 작업이 아니라고 했지만 미지의 생물이 살아가는 장소로 적합해보였다.


아마도 이승현이 명화를 거쳐 바둑이라는 게임을 그의 이미지 바이러스의 서식지로 삼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바둑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다양성과 변화무쌍함과 한수 한 수 두어질 때마다 바뀌는 바둑판 위의 기세는 일정한 공간과 규칙을 따르면서도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어떤 바둑의 고수나 달인이라도 바둑의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며 바둑이 발명된 이래 단 한판도 같은 수순이 없으리라는 것이 수학자들의 추론이다. 바둑은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라 상대가 있다. 즉 타자와의 마주침이고 타자의 의도를 읽고 그에 따라 반응하거나, 혹은 의표를 찌름으로써 배후를 친다.

바둑판과 비슷한 네모 칸이 그려진 이승현의 종이는 유사성이 있다. 바이러스의 증식과 바둑돌의 증식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비슷한 것뿐이다. 왜냐면 바둑이 요구하는 상상력과 이승현의 이미지가 가지는 상상력은 그 방향과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둑은 기본적으로 승리를 목표로 하는 게임이다. 바둑의 과정은 돌을 놓아 살리고 자신의 영역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흑, 백으로 나뉜 돌들은 영향력을 확대하고, 상대방을 방해하고, 내 집을 지키고, 침투하고 죽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들이 끝나면 누가 집을 더 많이 차지했는가 하는 계가가 이루어진다. 흑과 백이 차지한 영역과 죽은 돌들을 합산한 결과이다. 승부를 명확히 내기 위해 추상적인 반집이라는 개념과 먼저 두는 흑의 유리함을 상쇄하기 위해 덤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승현의 이미지들은 승부도 과정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에 관심이 없다. 다만 최종적인 바둑에서 촉발 받은 이미지들이 화면 위에 있을 뿐이다. 커다란 샤알레 위에 증식된 바이러스들처럼. 그의 반상변이 연작에서 흥미로운 것의 하나는 사석, 죽은 돌들에 대한 관심이다. 죽은 돌은 좌표가 기록되고 한 점 한 점 마다 개별적 형태를 갖는다. 종이위에 놓인 돌들의 검은 실루엣은 바둑에서 벌어진 전투의 과정과 그 결과를 상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개별적 형태들은 뭔가를 함축하고 있는 듯이도 보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지가 만들어진 과정일 것이다. 그의 작업은 사실 결과보다 과정이 훨씬 중요할 수도 있다. 마치 바둑이 결과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두어졌던 새로운 수들이 바둑의 지평을 새롭게 넓히듯이.


다빈치는 화가란 벽과 돌의 무늬에서도 다양한 풍경, 미지의 생명체, 모든 형태의 전투 따위를 연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화가들이 가진 상상력에 대한 예찬이거나 주문일 것이다. 이승현의 상상력은 얼룩에서 시작해 증식에 증식을 거듭해왔다. 그 증식은 대개 특정한 방향이 없었고 몽상적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가를 탐색하듯이 그는 과거의 걸작들의 변형을 거쳐 현실적 게임인 바둑과 결합시키려 시도한다. 그 결합은 성공적인 것일까? 그에 대한 질문은 스스로 답해야 하리라.

작가로 사는 것 자체가 한 판의 바둑이라면 이승현은 포석 단계를 지나 치열한 중반전에 접어들었다. 전투가 계속되고 뭘 버리고, 어디에 집을 지어야 할지 빨리 형세 판단을 해야 하는 지금 부터가 진정한 승부이리라.



_강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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