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깊어지다         장현주

February 5 - February 26, 2015

2월 5일 부터 2월 26일 까지 장현주 작가의 '숲,깊어지다' 전이 진행됩니다.


섬유질 형해로 남은 기억_이선영(미술평론가)

매순간 화려하고 재미있고 다채로운 것들이 총천연색으로 펼쳐지는 듯한 일상 속에서 점차 사라지거나 쪼그라드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그 일상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믿어졌던 자아 가 아닐까. 자아는 본래부터 있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 매순간 외부에 대항(응)해서 구축하는 과정 중에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자신도 모르게 쓸려가 버린다. 외부와 내부의 균형을 생각할 틈도 없이 무한 확장되어가는 외부는 의식은 물론 육체와 무의식도 점령해버리기 때문이다. 손안의 인터넷이 펼쳐지고 나서 그러한 침투는 더욱 집요해진 듯하다. 정보, 상품, 시간의 소비 뿐 아니라, 일상을 재생산하기 위한 노동 역시 나를 고갈시킨다.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점에서, 어느 때 보다도 예술 하기가 힘들어진 이 때, 예술은 진정한 필요와 요구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일반인들에게 작가가 부러운 점은, 그들에겐 그들만의 세계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시공간을 가진 사람이 바로 작가다. 이러한 시공간은 작품 특유의 아우라를 만든다.


언제 어떻게 ‘결실’을 맺을지 모를 그들의 열정적이면서도 막연한 활동은 자기만의 리듬으로 시간을 가속시키면서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유희하는 모든 요소들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절묘한 순간들을 맞게 되며, 누가 알아주든 말든 이미 그 자신의 차원에서 희열이라는 보상을 얻는다. 그러나 작업 외에 어떤 선택도 남겨두지 않은 극단적인 소수를 포함하여 작가들 역시 오롯하게 자기만의 시공간을 구축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그 자체가 갈등이자 투쟁이 되곤 한다. 대학 때 서양화를 전공했으나, 일상인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시금 붓을 들었을 때, 장현주가 생각했던 것은 거창한 미학적 목적이 아니었다. 나만의 방에서 나를 돌아보고, 나만의 숲에서 나를 일궈보는 소박한 꿈이었다. 2007년 첫 개인전 ‘지우개로 그린 풍경’ 이후, 4회의 개인전을 거치는 동안 그 꿈은 조금씩 현실이 되어갔고, 이번 전시는 ‘숲, 깊어지다’라는 부제처럼 자기만의 방과 숲이라는 상상적 시공간의 또 다른 문턱(threshold)에 서 있다.


[woods-일련번호]같은 밋밋한 제목을 달고 있는 작품들은 장지에 먹과 목탄, 분채로 그려졌으며, 거의 모노톤이다. 종이와 먹이라는 동양화 재료로 깊이 스며들고 배어나오는 바탕 처리를 하고, 목탄이라는 서양화 재료로 바탕 위에서 운동하는 듯한 선을 그린다. 바탕으로 스며들지 않고 두드러지는 목탄의 선은 정확한 외곽선을 이루거나 어떤 서사적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는 않지만, 수동적인 공간에 능동적인 시간성을 부여한다. 이전 작품에서, 바느질로 드로잉 한 소품 또한 선적 요소와 시간을 연결시킨다. 선은 나무나 숲길을 떠오르게 하는 요소이며, 먹과 목탄으로 이루어진 모노톤의 화면은 화려함 대신에 흑백 사진 같은 깊이가 있다. 선들의 중첩, 그 사이사이의 공간은 화면에 깊이를 주는 요소이다. 제목과 달리, 작품은 숲을 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재현을 기준으로 한다면 장현주의 작품은 생략이 더 많다. 모노톤의 그림들은 명명백백한 색과 형태에 치중하기 보다는, 한 겹 또는 여러 겹의 베일에 감춰진 풍경으로 다가온다.


자연적 대상, 또는 요소는 시간 속에서 분명해졌다가 시간 속에서 희미해진다. 시간은 그림 속에서 공간화 된다. 나무에서 발견되는 직선적 요소, 조금이라도 햇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한 위로 펼쳐진 구조, 꽃이나 열매에서 발견될 법한 오글오글한 형상, 지평선 등, 재현적 요소가 있지만, 그것은 당장의 선명한 지각이 아닌 시간이라는 필터로 다시 걸러진 기억의 풍경이다. 필터는 상세한 자연주의적 요소로 가득했을 특정 풍경을 단순화한다. 그러나 어떤 요소는 더 강조되기도 한다. 우리의 기억이나 꿈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림 속에 남아있는 것은 섬유질처럼 질긴 것들이다. 시간은 종이 사이에 말려놓은 식물처럼 보존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도 남아있는 섬유질 기억들은 최소한의 요건만 갖춘다. 이러한 감축에도 불구하고, 공기, 바람, 축축함, 어둑함, 어둠 속에 스며드는 빛 등과 같이, 숲에서 느꼈을 법한 물리적 감각은 남아있다.


그것은 무엇을 명확히 재현하거나 표현하기 보다는 어떤 정조로 물들어 있다. 색이 있는 작품의 경우, 색칠했다기 보다는 염료에 살짝 담갔다 뺀 듯한 빛깔이다. 작가는 풍경을 볼 때의 먹먹함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막막함과도 다른 먹먹함! 먹으로 그린 먹먹한 풍경이라니! 새삼 우리말 표현의 절묘함에 대해 생각한다. 화면에 드리워진 여러 겹의 베일은 베일을 하나하나 헤치고 나아가는 더 깊숙한 배회를 예시한다. 서양화처럼 위로 쌓이는 구조가 아니기에, 화면은 얇고 가벼우면서도 중층적이다. 중층적이긴 하지만 화석이나 지층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부침(浮沈)이 유동적이다. 심연에 던져진 돌멩이는 깊숙이 가라앉은 것들의 자리바꿈을 야기할 것이다. 지금의 지각은 또 다른 기억을 환기시키며, 기억은 어떤 지각을 민감하게 할 수 있다. 기억이라는 시간의 이미지를 공간화 시킨다면, 이러한 겹 구조가 될 것이다. 어떤 면에 새겨진 어떤 요소가 다른 면에 새겨진 다른 요소와 조응할 것이며, 그 조합은 그릴 때 그러했던 것처럼 볼 때마다 다를 것이다.


그림이라는 고정된 매체 속에서도 가변적이면서도 유동적인 느낌을 살린다. 그것은 스케치 없이 시작하고, 매 순간 직면하는 감정이나 생각을 즉시 발산함으로서 가능했다.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에 충실한 장현주는 대학 입학을 계기로 서울에 올라온 시골 출신으로, 인위적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 현재의 자연발생적인 이미지는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환경이 산과 들, 숲이었다는 사실과 밀접하다. 유년기와 청년기의 자연적 체험이 평생의 자산이 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원초적 기억의 비중이 커지는 작가들이 있다. 장현주는 분명 그 부류다. 물론 지금은 강남과 분당이라는 초도시적 환경에서 살며 작업하고 있지만, 그녀의 작업이 지각이 아니라 기억에 기대고 있다는 점, 그것도 어제오늘의 기억이 아니라, 먼 과거에 있다는 점은 원초적 무의식의 장으로서의 자연의 위상을 알려준다. 숲이라는 부분은 자연이라는 전체를 대신하는 일종의 제유법이다. 이 전시에서 숲을 이루는 나무는 보이지 않는 세계 또한 함축한다.


지상의 가지와 지하의 뿌리가 동형성을 가지는 나무처럼, 보이는 세계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세계가 그만큼 존재한다. 보이는/보이지 않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작가에게 그리기/ 지우기는 동렬에 놓인다. 특히 작가는 힘든 학교생활을 보상해주었던 고향 가는 길의 추억을 소중히 여긴다. 해질녘 무렵쯤에 고향 집에 도착하기까지 버스로 거쳐 왔던 꼬불꼬불한 문경세재의 길은 변화무쌍하게 다가왔던 풍경의 경험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사진처럼 한 장면으로 고착된 것이 아니라 영화처럼 여러 장면이 중첩된 것이며, 장현주의 풍경화에는 그러한 중첩의 흔적이 남아있다. 점에서 점으로 수평 이동하는 지금의 초고속 운송수단이 아니라, 자연의 굴곡 면을 따라 굽이치며 다가왔던 풍경들은 그녀의 그림에 복잡한 선의 흐름들을 만들어냈다. 한 시점과 지점으로 한정되는 풍경이 아니기에, 그리는 당시에는 작가 스스로도 뭘 그리는지 어디를 그리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몰입하다가, 배접을 하는 단계에 이르러서야 그때와 어디가 기억난다고 말한다.


인위적 의도와 의지는 그림을 망칠가능성을 더 높일 뿐이다. 그만큼 장현주의 작품은 자신의 무의식과 몸 깊숙한 것에서 꺼낸 것이며, 작품이 아니고선 어떤 방식으로도 외화하기 힘든 미묘한 순간들이다. 작품이란 눈썰미에서 눈썰미로 손끝에서 손끝으로 번역될 뿐인 외적인 과정이 아니라, 몸 깊숙이에 넣고 다시 빼는 내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작품은 무엇보다도 작가 스스로와 긴밀하다. 작업은 그 누구에게 보여주기 보다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거울 같다. 이 거울은 세상을 보는 창이 될 수도 있다. 자기가 풍부해지는 만큼 세상도 풍부해진다. 모노톤의 바탕 화면에 자유로이 그어진 선적인 표현방식은 일종의 쓰기를 연상케 하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일기 같은 것이다. 욕망이 삶으로 다 해소되는 부류는 그러한 일기를 결코 쓰지 않는다. 작업은 자신에게 헌신하는 이에게만 약간의 기회를 줄 뿐이다. 쓰고 나서야, 그리고 나서야 내가 말하고자하는 바가 뭔지, 내가 진정 봤던 것이 뭔지 의식화되는 마술적인 과정으로서의 작업이다.


그래서 쓰기-그리기는 이미 있던 것을 재현(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이며 생산이다. 그것은 먼 과거와 먼 미래까지도 포괄하는 시간의 폭을 가지며, 지금 이 순간 또한 강밀하게 하기에, 진정한 나 또는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는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자연과 하나 되는 순간이 바로 자유일 것이며, 예술은 그러한 매개가 되어준다. 위로와 안식, 그리고 갱신은 그 과정에 딸려오는 작은 미덕이다. 장현주는 그러한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 그러나 이 방은 닫혀있지는 않다. 도피처가 아니라 안식처이고, 외진 방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에 있는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그녀의 방은 닫혀있으면서도 열려있는 숲을 닮았다. 작가에게 숲은 엉성한 울타리로 둘러쳐 있는 지붕이 없는 방이다. 거기에는 색색의 꽃도 노래하는 새도 소풍 온 사람도 발견할 수 없지만, 그 전체가 자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내부이다. 숲이나 풍경이라는 잠재적 설정은 불연속적인 집합들에 대해 자연스러운 문맥을 제공한다.


작업이라는 무위의 노동은 미를 창조하는 거창한 행위이기 보다는, 놀이와 수행의 중간과정 쯤에 해당된다. 동양화에 시서화를 하나로 간주하는 전통이 있는 것처럼, 그림 속 자유로운 선들은 식물적 형상에 원형을 두면서도 기호화되고 있는 과정들이다. 선과 선의 얽힘들은 어떤 때는 희박하고 어떤 때는 복잡하기도 하지만, 미로와도 같이 얽혀있다. 기억의 과정 자체가 미로와 비교될 수 있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벤야민의 작품을 유년 시절과 결부시키면서, 유년 시절의 베를린 거리와 골목길의 복잡한 망은 얽히고설킨 기억의 실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벤야민에게는 도시이고 장현주에게는 자연이지만, 어떤 장소에 관련된 기억이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장현주의 작품에서도 수직수평선이 조밀하게 교차되는 어떤 이미지는 도시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막이 쳐진 듯한 화면은 언제라도 성가신 햇빛이나 타인의 눈길을 피해 풍경이 보이는 창문의 차양 막을 내릴 수 있는 도시적 시선과도 겹쳐진다. 도시 또한 이제 자연처럼 무한하고 불가해한 생태계이자 환경으로 다가온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벤야민에게 기억과 장소는 시작도 끝도 없는, 끊임없이 보강해야 할 미로의 형상이다. 과거로의 여행은 멀리 떨어진 곳으로의 항해이며, 기억속의 움직임은 미로 속의 움직임과 유사하다. 미로 속의 움직임은 늘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가는 것처럼 빙글빙글 돈다. 이때 시간은 선형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움직일 때 시간은 뒤에 머무르지 않고, 미로의 공간처럼 아무리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도 끊임없이 되돌아오기에 시간을 다시 만나게 된다. 과거는 끊임없이 기억이 순환하여 마치 처음인 듯 반복적으로 대상과 만나게 되는 미로이다. 자크 아탈리가 [미로]에서 말했듯이, 미로 속에서 전진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미로 속에서 계속 길을 잃고 재발견하고, 미지로 여행을 한다. 장현주의 작품에서 숲이나 방이라는 은유적 공간은 외부적으로는 한정되어있지만, 그 내부에 무한의 겹을 내장한다. 미로라는 공간적 이미지와 기억이라는 시간적 과정이 겹쳐진다. 작품 속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선들과 텅 빈 공간은 잃어버린 시공간을 암시하며, 작업이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시간’(프루스트)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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