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ce, please         한지석

April 2 - April 26, 2015

4월 2일부터 4월 26일까지 한지석 작가의 Silence, please 전이 개최됩니다.



볼-수-없는-전시


나는 라호라가 폐허와 유령 도시의 혼합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과 ‘벌써 다시 무너지고 있음’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 위에 놓인 변형이라고 표현했다.
- 율리 체, 『잠수 한계 시간』, 민음사, 2012, 19쪽


정주하지 못하는 삶을 한마디로 부유하는 삶이라 부를 수 있는가? 수평선의 끝을 향해 아무리 외친다 해도 단말마의 메아리 하나 울리지 않는 그곳은 여전히 초점을 잃은 시선들이 머무는 곳이다. 한지석은 메아리가 사라진 지금 이곳에 대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회화와 프린트 이미지가 전시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기둥에 박힌 조명들이 간헐적으로 마른기침을 내뱉듯 발광한다. 조도가 낮은 공간에서 이미지는 아무런 힘이 없다. 단 그곳에 이미지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어둠은 세상의 많은 것을 감추어버린다. 세밀한 삶의 장식과 흔적들, 숨기려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 사회적 가치에 따라 새겨진 영광스런 주름과 초라한 민낯도 어둠은 모두 삼켜버리니 말이다. 이 전시의 가장 큰 모순은 제대로 작품을 관람할 수 없도록 만든 점이다. 언제나 회화는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는 관습의 대상이다. 전시장에 설치되는 대부분의 이미지는 유사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들이다. 어떠한 유형의 이미지 – 추상과 구상, 서사적 회화와 조형성을 강조한 그래픽까지 – 라도 세상에 소개되는 순간은 나름의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지석의 예술적 실험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보다 ‘감추려’는 데에 공을 들인다. 이 같은 실험은 초기에는 형상들을 그린 후 그 위에 여려 겹으로 그어진 선의 묶음들로 막을 드리워 작가가 제시하고픈 지시체들을 화면 사이사이에 비밀스레 숨겨 놓은 것처럼 배치했다. 회화 자체만 놓고 본다면 추상이나 심리적 풍경처럼 보이지만 화면 가까이 다가갈수록 숨겨진 단서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이후 전시 공간에 거대한 회화작품을 설치한 후 완전히 암전한 상태에서 소리에 반응하는 센서를 설치해 고함을 지르거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야만 잠시나마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시도를 감행한다. 이는 언제나 완전히 노출되어야만 한다는 회화 전시 규범에 대한 거절이자 작품을 보는 이와 작품 사이의 상호적 (긴말한 ) 관계성이란 역설이 나타난다.


동시대는 자신이 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욕망의 대상을 볼 수 있는 시대이다. 물론 장애물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해 볼 때 본다는 행위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온갖 정보와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희귀성, 기다림, 결정적인 만남의 환희의 강도는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 기쁨이자 동시에 고통인 결정적인 만남의 밀도가 옅어지는 비물질적인 네트워크 사회는 세상을 투명하게 만들어서 안과 밖의 경계도 허물어버린다. 경계의 지움을 수많은 차이들의 사라짐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현실은 시각적인 경계만을 허물었을 뿐 사회적 질서 속에서 서열화 된 생각의 차이가 쉽게 허물어지지는 않는 듯하다. 그래서 철학가 한병철은 동시대를 전시사회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전시는 곧 착취다. 전시하라는 명령은 거주라는 것 자체를 소멸시킨다. 세계 자체가 전시 공간이 될 때 거주는 불가능해진다. 거주가 소멸한 자리는 주의자본(注意資本)을 증식하기 위한 광고로 대체된다. 본래 거주란 ”만족한 상태, 평온해짐, 평온 속에 머무르기“를 뜻하는 말이었다. 항상적인 전시와 성과의 압박은 거주의 평화를 위협한다. 이와 함께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물도 완전히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사물은 전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전히 제의가치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만 온전히 볼 수 없는 전시란, 그것도 회화와 이미지 중심의 전시장의 조명이 꺼져 있다는 사실은 매우 부조리한 상황임에 분명하다. 전시, 이미지, 소리, 상품, 건축, 기계가 넘치는 세상이다. 과잉증식 되는 현대의 사물-이미지들은 결정적인 만남을 위한 대상들이 아니라 나타났다 곧 사라질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보려는 의지보다 보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시대에 ‘볼-수-없음’이란 명제로 출발한 한지석의 전시는 발터 벤야민이 예견한 자본시대의 전시가치를 거절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는 최근 끊임없이 나타나는 전 지구적인 재난으로부터 촉발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재난의 범위는 단순히 환경의 문제나 사건사고뿐만 아니라 인류를 맹목적으로 전진하라고 강요하는 지배적인 시대의 이념을 아우른다.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출처를 알 수 없는 인쇄물들은 미디어가 재난 현장을 포착해 반복 재생산된 이미지들에서 발췌된 것들이다. 한지석은 서사적으로 재난을 재현하는 대신 그 이미지의 일부를 잘라 확대해 망점만 남은 상태로 제시한다. 나는 이런 추출된 이미지들을 ‘이미지에 가깝고도 먼 대상’이라 부르고 싶다. 이처럼 탈 언어적인 이미지에 가깝고도 먼 대상들은 슬픔과 애도를 과잉으로 포장하는 미디어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기표를 없애는 작업이다. 미디어 경쟁은 고통과 슬픔마저 무감각한 것으로 변질시키고 결국 재난 이미지를 전시하는 형국을 초래한다. ‘볼-수-없음’은 이미지로 넘쳐나는 시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대변한다.


이미지 생산이 쉬워질수록 상실의 연민이나 기억의 소멸과 같은 고통은 재현된 이미지로 대체되는 듯하다. 슬픔도 아픔도, 결국에는, 하나의 이미지로 기록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공간 안에 전시된다. 네크워크에 연결된 사람들은 전시된 이미지에 반응한다. 고통이나 슬픔조차 공감한다는 ‘좋아요’의 가벼운 클릭으로. 어떤 현상이나 사건, 인물이나 시간을 관찰하고 숙성해서 사유하는 느린 과정과 사유 속에 머무름이 어려운 시대이다. 벤야민은 제의의 소멸과 전시를 오버랩하면서 사회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장면을 자각했다. 문제는 단순히 제의가치가 전시가치로 바뀌었다는 결과가 아니라 어떻게 전시가치가 오늘날 자본지배적인 권력의 수단이 되었는지를 인식하는 데에 있다. 더불어 이른바 문학과 예술, 대중영화와 인문학이 재난을 대상으로 다양한 담론 생산의 윤리성도 다시 한 번 되물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이 시대 공감의 차원을 넘어 정치적 쟁점이나 대중을 현혹하는 기제로 변질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재앙은 슬픔의 크기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상태에 나타난다고 한다. 헤아릴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은 재현되기 어렵기에 예술적 재현에는 작가의 책임이 전제되기 마련이다. 한지석은 완전하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한다. 전시는 관객이 내는 소리에 반응하는 조명에 의해 어렴풋이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의 심연을 재현하지 않는 대신 그는 점점 어두워지고 공기가 희박해진 상상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인 한 장소를 제시한다. 그 장소에 남겨진 사람들의 함께 힘을 합해서 잠시나마 밝은 빛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것 역시 긴 시간 지속되기 어렵다. 우리는 감히 전체를 보려 노력하지만 사실 주변의 사소한 것도 제대로 보고 느끼고 교감하며 살기 어렵다. 파편, 잔해, 해체와 같은 용어는 지나치게 현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한지석의 작업을 이러한 개념을 적용해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식이 아니다. 불현 듯 자신도 인지하지 못 한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소음에 의해 조명이 발광하고 이를 통해 관객은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이미지의 존재, 볼 수 있는 대상을 보다 명확하게 인지하게 될 것이다. 파편이나 잔해와 같은 낱말들이 사회와 예술 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전체주의적 구조로 만들어진 획일화된 시각의 시대에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회와 사회가 서로 만나는 접점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지는 탈중심사회가 새로운 탈출구라는 믿음 때문이다. 불확실성은 반대로 체계에 대한 사회적 집착으로 이어진다. 동시대는 미래를 꿈꿀 여유를 박탈당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현대인들은 이상을 펼치기보다 안전한 삶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재난은 재현을 통해서 확인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일상과 현실 속에 잠재하고 있다. 의식주를 비롯한 많은 삶의 활동이 불안과 공포를 없애 줄 수 있는 존재들로 채워지고 있으니 말이다. 보험, 병원, 학교, 학원, 안전시설, 친환경을 단 온갖 상품들과 물질들까지. 침잠한 듯 고요하고 어두운 에 입장한 관객들은 보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소리를 통해 드러내어야만 할 것이다. 명령과 질서에 복종하는 대신 이를 거부해야만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눈 먼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지를. 관객에게 한 가지 전시 관람에 대한 팁을 준다면, 억지로 전시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말고 전시장에 놓인 명명하기 어려운 것들(회화, 이미지, 조명 장치, 구조물 등)과 관계를 맺어보라는 것이다. 이 전시는 어려운 현대미술을 표방하지 않는다. 정말 어려운 것은 주어진 형식에 길들여진 관성과 태도를 버리는 것이니까.

/정현,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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