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실패        박지혜

July 24 - August 7, 2018

useless, 혼합재료, 30x2.5x17(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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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산 밀가루와 유기농 버터를 가지고 누구나 숯을 만들 수 있다. 적당한 덩어리를 오븐에 넣고 다이얼을 힘껏 돌린 뒤, 장래희망이나 노후 준비 같은 막막한 걸 생각하면 된다. 새까만 빛깔이 잘 안 나왔다면, 구두약을 듬뿍 발라보자. 어쩌면 먹음직스러운 빵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는 게 좋다. 요리를 망치는 방법,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어떤 일을 그르치는 경우의 수는 참- 많다. 더욱이 완결/성공의 조건이 지독히 까다롭고 동시에 유동적이라면, 실패는 그중 아무거나 하나만 틀어지면 되기 때문에 무척 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또 하나, 간신히 거머쥔 성취라도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평가하는 사람의 취향이나 문화의 차이를 비롯하여 일이 진행되는 동안 급변하는 세상 물정까지, 그야말로 나를 겨눈 거대한 음모가 있지 않고서야! 하여 크건 작건 공든 탑이 무너질 때마다 일일이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
생활이 그러하니 작업도 전시도 눈앞에 선하다. 어떠한 계획이라도 정말 완벽하게 실현할 수는 없다. 시간과 비용은 예나 지금이나 빠듯한데(아니 ‘유한한’ 자원이 충분했던 적은 있었나!) 실패를 발판 삼으면 다음에 더 잘할 수 있을까. 아마 그때는 다시 조건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융통성이라는 명분으로 목표치-성공의 기준-를 슬그머니 바꾸는 편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앞서 말한 ‘정성 들인 숯’이 본래의 재료값을 하려면 몇 가지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다.

빵을 만들 의지가 있다.
어떻게 만드는지 안다.
변질되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것 없이 재료가 성하다.
오븐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그동안 전기/가스 요금을 성실히 납부하여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
재료를 계량, 성형할 도구가 있다.
반죽에 필요한 양손과 체력이 있다.
발효를 기다릴 만큼 참을성이 있다.
숫자를 읽을 수 있다.
그 밖에 떠오르는 온갖 것들...

사실 위에 나열한 것 중 무엇 하나 충족되지 않아도 빵을 먹을 수 있다. 가까운 베이커리에서 사 오면 그만이다. 처음부터 ‘직접 만들어’ 먹기가 아니라 ‘먹는’ 행위가 목표였던 것처럼 생각을 바꾸면 그날의 뻘짓거리는 무효에 가까워진다. 물론 어질러놓은 주방을 정리하기가 썩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무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빵을 먹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이고, 만들기에 실패한 일은 없었던 셈 치면 된다. 이러한 합리화는 도처에 널려 있다. 다만 각각의 사연이 단순히 개인적 판단에 의한 것인지, 다수의 암묵적 합의인지는 상황에 따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합리화 찬스 이전에 폐기되는 시도 자체를 줄이기 위해서 나는 남의 눈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것,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전제/약속/규칙들을 우선순위에 두면 책임의 규모가 조금이라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을 시작하기 전 항상 ‘하면 안 되는 것’부터 체크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변수에는 다른 잣대를 적용하거나 못 본 척 하는 식으로 음흉한 완벽주의를 고집한다. 실은 말도 안 되게 엉성하고 위태로운 것을.
불행인지 다행인지, 실패는 죄와 다르다. 가슴속에 품고 끊임없이 반성하지 않아도 된다. 바꿔 말해 구태여 고백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본디 듣기 괴로운 이야기는 비밀로 묻는 게 미덕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가치를 상실한 도전은 밀봉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여기서 현실과 이상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실패가 감춰진 세계는 영 남일 같은 위인전처럼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엄마 친구 딸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언제까지고 나의 비정상적인(!!) 예술 생산보다 우위에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기분 나쁘게 이상한데 이상하다고 말을 할 수 없다. 5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며, 나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내어놓고 있다. 정상과 비정상,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는 자는 누가 쥐고 있으며 그것은 누가, 언제, 왜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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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개인전 (2017.09-10)에서 나는 흑백논리의 중간지대[회색 스펙트럼]를 통해 시스템의 양 극단을 반추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되었던 불합리한 틀[형식/규칙/제한]을 적극 활용하여 오브제와 설치 작품으로 공간을 구성하였다. 제목에 비추어 말하자면, 플립턴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결과를 가리키는데, 이 전시는 그 사이를 빽빽하게 채운 스트로크, 킥, 숨 가쁜 호흡 따위가 경기의 룰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의 삶으로 확장하여 형식과 내용, 목적과 수단이 제 자리에 있는지 의심해보기를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다시 뜨거운 여름과 함께 할 <평범한 실패>(2018.07-08)는 직전 전시의 주제를 이어가면서 태도에서는 약간의 변화를 갖는다. 기존의 한발 물러난 현상 제시에 움직임이 더해지는 식이다. 줌인-줌아웃을 거듭하며 다양한 거리를 담아보는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번에도 나는 일상의 그레이 스케일을 거닐며 어련히 바스러지거나 휙 날아가 버릴 사정을 수집한다. 유물 발굴하듯 이야깃거리의 흙먼지를 살살 털고 관찰하는가 하면, 실패를 양산하는 ‘어떤 힘’의 이동경로를 멀리서 지켜보기도 한다.
본 전시는 거창한 담론도, 구구절절한 하소연도 아니다. 나는, 모두는, 인식하지 못할 만큼 빈번히 숱한 실패를 외면하거나 검증에 목을 매거나 아예 아무도 가질 수 없게 성공을 멀리 걷어차 버리기도 한다. 그 끝에 남을 의뭉스러운 자괴감이 과연 맞는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남의 밭에서 영원히 손에 닿지 않을 성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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