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휘감는 가장 긴 무덤: 정경빈

4 - 30 Decem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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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는, 이름을 얻지 못한 ‘뼈와 영혼’이 반도의 산천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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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령골은 ‘곤룡산’이라 불리던 대전시 동남부 야산의 인근 골짜기를 가리킨다곤룡산 자락의 땅에 묻힌 () 영혼()들의 이야기가 들리면서부터는 지금처럼 ‘골령골’이라 불리게 됐다

     

    교회 건립을 위한 삽을 날이었다. 끝에 무언가 걸렸다. 뼈다. 뼈가 무더기다. 놀라 소스라치며 사람들이 흩어졌다. 뼈를 다른 곳으로 치우고 땅에 쓰레기 따위를 가져다 놓고, 여러 수를 보았지만, 결국 공사는 중단되었다

     

    아래에 묻힌 이야기는 그렇게 빛을 보게 되었을까.

     

    1950, 일이 있은 얼마 지나지 않은 동안 골짜기에서 나온 핏물이 아래 마을로 줄줄 흘러내렸다고 한다. 가까이 없을 만큼 강한 냄새가 골어귀에 진동했다. 골짜기는 부랑자나 들개들이 먹거리를 찾기 위해 나타난 때를 제외하곤 드나드는 이가 없는 땅이 되었다. 아래 마을 사람들은 개의 입에 들린 기다란 막대가 사람의 ‘뼈’였다고 말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기억은 누군가에게 선연히 남아 죄책감을 느끼게 했고, 누군가에겐 지워졌다.

     

    2007, 발굴단이 드디어 거기 도달했고, 파헤친 아래 조각들을 줍는 일이 착수됐다. 명백히 ‘뼈’의 모양을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뼈’로 간주되는 것을 서로 구별하는 일도 어려웠다. () 씨의 허벅지뼈가 다른 모씨의 조각난 머리뼈와 붙어 있는 식이다. 전자와 후자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조각들이 부딪다 가루가 버리기도 한다. 조각, 가루들은 땅에 놓인 한낱 ‘사물’이면서 동시에 ‘인격’을 가졌다 여겨진다. 뼈의 물질성은 이중의 구속 상태에 처한다: 나동그라질 사물과 붙잡아야 누군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면, 깊이 묻혔던 조각이 수면 위로 올라와 마을까지 휩쓸려 오기도 했다. 비가 긋고 발굴단이 돌아올 때까지, 마을 사람은 골에서 떠내려오는 조각들을 줍고 모아 조사원이 발견하기 쉽도록 평상 아래 두었다. 평상 아래엔 정리되지 않은 조각들이 쌓였다

     

    여전히, 아래에 묻힌 무엇엔 이름이 없다. 어떤 ‘뼈’는 발굴되고 수습되고 DNA 검사를 거쳐서 00, 00, 00 …의 잃어버린 가족으로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이름을 얻은 근처에 있던 다수의 뼈는돌무더기로 흙으로 거기 머물 것이다. 수십의 해가 지나는 동안 풀과 꽃과 열매를 틔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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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빈이 골령골에 도착했을 , 거기 것이라고는 무성한 풀뿐이었다풀숲, 그리고 하얀 꽃잎에 노란 술을 개망초 무리가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무심히 지키는 아래로 발굴 당시의 모습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다표지판에는 발굴 초기, 뼈무덤이 훤히 보이는 벗은 땅의 사진이 붙어 있다표지판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곳의 산란한 모습을 상상해본다. 거의 떠올리기 힘든‘기억’보다 곱절로 힘이 드는 ‘상상’을 동원해 본다.

     

    사람들은 그때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되었을까? 멀리는 제주, 가까이는 대전 형무소에서 이곳까지 사람들이 끌려왔다. 그들은 눈을 가린 채였을까손은 묶인 채였을까? 아니면, 훤한 대낮, 모든 광경이 선명히 보이는데, 자기 운명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며 먼저 이의 뒤를 따라 나섰을까? 전쟁의 한가운데, 국군과 경찰의 총뿌리에 겨눠진 사람들.³ 비명과 침묵 사이. 비탄과 체념 사이. 정경빈은 정처 없이 사이를 좇으며, 덧없이 상상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상상한다는 , 그린다는 것은 자주 무력하게 느껴진다. 매달 골령골을 찾으면서 작가는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땅을 들여다보고, 유달리 꽃이 많이 피어난 자리에 보기도 했다. 위령제에 가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대전에서 평생을 친척에게 ‘골령골’의 존재를 묻고, 알지 못한다는 답을 듣기도 했다. 거의 보이지 않는 , 거의 들리지 않는 것을 과연 어떻게 드러낼 있을까?

     

    정경빈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후, 현재의 우리가 닿을 있는 현재의 땅을 향한다. 그리고 땅에 남은 물질, 사건을 분자적 수준에서 간직하고 있는 흔적의 물질을 그린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작업은 발굴되거나 발굴되지 못한 ‘뼈’, 아직 뭐라 이름을 얻지 못한 비인칭적 조각들을 닮았다. 정경빈의 회화가 드러내는 것은 사물과 인격 사이에 놓인 ‘골령’의 물질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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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가운데에는 사람 하나가 누우면 가득 크기의 평상이 놓여 있다검고 낮은 그것은 관처럼 놓여 있다. 위에는 작가가 학살의 터를 오가며 쓰고 그린 것을 묶은 (『똬리 Coiling, 2025) 올려 두었다.

     

    벽을 채우는 커다란 그림들은, (섬유근육통 질환을 앓고 있는) 작가가 떨리는 붓질로 성글게 선을 그어 면이 되도록 채워 넣은 추상적 화면으로 나타난다. 안료를 섞어 흘러내리듯 바탕을 처리하고, 위에 물감의 두께를 달리해 선들을 쌓아 올리는 작업 과정은, 작가가 일종의 피부로서 대하는 표면의 물질성을 확인케 한다.

     

    전시장 가장 안쪽 벽을 채우고 있는 점의 〈빨간 땅〉(2025) 팔을 크게 휘둘러 선을 긋고, 그렇게 몸짓으로 남긴 위에 새로운 선을 덧대고 덧대 완성한 것이다. 선을 길게 길게 늘여 똬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작가는 자기 몸을 소진시키고, 그와 동시에 타인의 몸과 몸이 쌓여서 산이 어떤 무덤을 떠올린다.

     

    단색조가 두드러지는 그림들에서 색은 중요한 요소다. 〈빨간 _빨간 산〉에서 작가는 “죽은 얼굴(Caput Mortuum)”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감을 사용한다. 보랏빛과 갈빛이 도는 짙은 색은, 17세기경 연금술의 과정에서 태우다 남은 찌꺼기를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 누군가는 ‘미이라’를 태워서 만든 색이라는 이야기를 덧대기도 한다. 〈빨간 _똬리〉에서 두드러지는 검은 색은 복숭아 씨를 태워서 만들었다는 “피치 블랙” 물감에서 비롯된다이외에도 다양한 물감의 이름과 색의 연관, 색이 만들어진 역사를 틈틈이

    찾아보는 작가는 색의 역사가 오래된 물감들일수록 무언가를 태워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발견한다. 태워 만든 안료로 쌓아 올린 물질인 회화는 그렇게 땅이 , 무덤, 무덤 위에 솟은 풍경이 된다.

     

    마찬가지로, 〈땅 또는 몸〉(2025) 연작에서 획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붉은 붓질은, 우리가 보고 밟고 있는 땅의 배면에 자리한 , 결을 떠올리게 한다. 회화 전면을 채운 색은, 살이 맞닿은 , 갈라진 상처의 틈 같게도 보이고, 깊이를 헤아릴 없는 구덩이, 오래도록 무언가 고여 있던 자리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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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적인 차원에서 학살지의 유해는 협소하게 존재한다. 그것은 몸이 두께를 잃고 백골화되고 토양의 분자가 되는 과정 속에 정말로 사라지고 있는 상태다여기서 어떤 사람을, 민중을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정경빈은 유해가 자리했던 땅을 들여다보기로, 거기 가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풍경으로, 정물로, 추상으로 그려 보기로 했다. 작업 과정은, 거의 없는가까스로 존재하는“남은 뼈”를 수습하는 일과 그리 멀어보이지 않는다.

     

    손바닥만 크기에 ( 이상의 사람이 기대고 있는 듯도 보이는어렴풋한 형상을 그린 드로잉이 〈민중〉(2025)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까. 정경빈은 2023년부터 국내의 민간인 학살 지역을 다니며 이야기와 이미지를 수집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지의 재현, 재현적 이미지가 처한 난제를 계속 굴려가고 있다. 묻힌 살들을 드러내기, 땅을 헤집고 벌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기. 《산을 휘감는 가장 무덤》은 불가능한 과제처럼 주어진 일을 시도한다.

     

    글 허호정

     


    ¹ ‘골령골’은 1950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최소 1800 ~ 최대 7000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행정구역상 대전광역시 동구 산내동에 위치한다. 지역에서 2024 기준 1472구의 유해가 발굴 수습됐다. 유해가 발견된 8개의 구덩이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1km 달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시 제목은 여기서 착안했다. 관련 내용은 다음을 참고. 엄선영「뼈가 산처럼 쌓여… 맺힌 골짜기에도 들까대전 산내 골령골 사건」『고대신문』(2023-04-03)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40796 ; 임아연, 「‘골령골’ 평화공원 10년만에 뜨는데… 유족들 반발하는 까닭」『오마이뉴스』(2025-07-28)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52174 .

     

    ² 이하의 내용은 다음의 논문에서 다루는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김태인「유해의 물질성과 기억의 정치: 한국전쟁기 대전 골령골 민간인학살지 유해발굴 사례 연구」『한국문화인류학』 57-3 (2024): 93-132.

     

    ³  ‘동류’라 여겨지는 인민(people) 의한 인민 학살의 문제는‘살해할 권리’를 특정하게 점유하는 비합리적 사태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국군에 의한 인민 살해를 마주한 시민의 충격에 관해선 5.18 연구를 참고해볼 있다“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최정기 씨는 영상(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 〈이동하는 경계들〉(2018) )에서 위안부 여성6.25 전쟁 당시 학살 피해 유족, 베트남 참전자들을 만나고 연구한 자신의 경험을 언급한다. () 그러면서 그는 5.18 광주의 희생자와 유족들이 겪은 트라우마의 층위가 다음과 같은 충격에 뿌리 박혀 있다고 말한다. 전쟁에서는 적군이 상정되고 나의 죽음이 어느 정도 예견되는 것과 달리, 광주 시민들은 어느 것도 예상할 없었다는 것이다. () “어떻게 국군이 우리에게 이럴 있지?”,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가 인민에게 이럴 있지?”” 내가 다음의 글에서 인용「광주, 여전히 [] 않는 것들」『크리틱-칼』(2018-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