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y Symphony: Lee 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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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적으로 귀여운 우울의 움짤화(畵)
양효실(비평)
<아기공룡 둘리>, <세일러문>과 같은 애니가 성장기의 문화적 텍스트인 세대의 화가 이은(1995년生)은 “움짤”을 회화적으로 전유-번역하는 작업을 통해 미술계로 본격 진입했다. 주로 의인화된 동물들인 애니의 캐릭터는 움짤화되면서 원래 소속되어 있던, 인물을 이해가능하게 만들어 주던 서사를 빼고 인물을 무의미한 반복의 동작으로 포획하는, 영구적인 진동-발작 상태로 고착화 하는, 우리의 편안한 관조/감상의 전제인 시야를 어지럽히는 (불)쾌한 중첩에 투항한다. MZ세대로 불리는 동시대 청년기의 감각을 대변하는 이러한 움짤적 경련을 작가는 회화적으로 반복-번역하면서 진퇴양난 상태의 몸,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면서 떠안은 서사의 비가시적 작인에 불과해야 할 몸을 그러므로 관성적 지지대가 부재하는 상태로 고립화한다. 지금도 즐기는 유년기적 텍스트의 파편적 이미지에 대한 이 작가의 회화적 필사는 물론 매끄러운 필름의 (화학적)표면을 “더러운” 추상표현주의적 (물질적인)바탕으로 옮겨놓는 작업이기에 과거 행복했던 시절로의 퇴행적 제스쳐이자 그 시절로의 귀환의 불가능성을 전경화하는 자의식적 실천으로도 읽힌다. 원본(레퍼런스)이 애니이고 카피본이 회화인 이러한 뒤집기를 통해 회화의 권위가 위험해졌다고 읽을 수도, 성년기의 형식인 회화로 유년기 나아가 동시대 청년들의 문화인 애니를 반복함으로써 낡은 매체로서의 회화를 쇄신하는 통섭적 행위로도 읽을 수 있다.
지나간 과거를 인용하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이 동일시하는 의인화된 동물들을 제자리에서 경련-발작하는, 미래 같은 것은 처음부터 작동하지 않는 순간의 감각에 유년기적 캐릭터를 얹혀 놓은, 관념적 전진(progression)의 의미-가치를 말끔히 제거한 비행위(inaction)에 다름 아닌 분열증적 반복에 대한 강박적 유희―21세기적 텍스트인 움짤과 이 작가의 움짤화에 모두 적용되는―를 나는 “역사”의 파국을 실존적 내부로 살아가는 특정 세대의 공통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MZ의 세계감으로서의 무기력, 경련은 한때 진보적 역사의 작인으로 우대받았던 나 같은 기성세대가 배워야 하는, 파국의 육체적 감각이다. “그래픽 인터체인지 포맷(GIF)”의 덕을 본 이들 캐릭터들이 현시하는 것은 영구적 상태로서의 지진(지반의 불안정성)과의 합체(union), 어리고 어리석은 동물들이 대역이기에 귀여워진 비극, 약간의 격렬한 미열/미동으로서의 관성(inertia)이 이 작가가 포착한 이 세대의 몸의 현장이다. 이 작가의 회화적 시그니쳐인 “움짤화”를 통해 나는 시대를 세대를 나는 알지 못하는 감각의 논리를 읽는다. 이들은 기성세대 진보적 역사관-시간관의 피해자들, 생존자들 중 거대한 집단을 이룬 얼룩, 비체들이다.
만연한 파국의 예감들, 종말론적인 사건들, 인류세가 대표하는 위기들이 소수자들의 몸을 표적으로, 숙주로, 공동거주(cohabitation)의 현장으로 현시한다. 여기서는/거기서는 미래를 뺀 채 과거와 현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 관계들”을 맺고 있고, 계속 오고 있는 과거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어리고 어리석은 몸들이 비생산적인 그러므로 저열한 쾌락에 충실할 것이다. 움짤을 원본으로 한 움짤화는 이제 진짜 바퀴가 달려서 경사로를 내포한 채 그냥 몰락으로 돌진할 듯하지만(성인용) 더 귀여워졌기에 무해하고(어린 혹은 퇴행적인 관객용), 이러한 트랜스세대적 접경지대에서 생존하려는 작가의 더 정교한, 그렇다고 머리를 쓴 것 같지는 않은 작업에서 내가 더 선명하게 감지하는 것은 “포스트” 담론들이 언제나 체화하고 있는 우울이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아렌트)인 토성을 체화한, 유토피아적 미래의 파산을 퇴행적 움직임(movement)으로 예시하는, 붓질에는 좀 열정적인 이 화가의 제자리-운동은 그럼에도 파국적 현장에서 독특한 몸-짓으로 생존 중인 소수자들의 “가능성”, 미래-의미-해방 없이도 나타나야 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나는 적는다. 늘 지금 죽어도 별 여한이 없다고 되뇌이는 “이 몸”으로 사는 것, 퇴행적 반복으로 현재를 견디는(suffering) 이 몸(들)은 분명 새로운 몸이고, 젊으니 싱싱하고, 귀여우니 무해하고, 우울하니 엠블렘이고, “집단적”이니 정치적이다. 오합지졸들, 오늘도 죽는 데 실패하고 그래서 살아있는 듯한, 그러므로 직전의 상태로 살아있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혐오스러운 생의 전문가들 이번 개인전 《Silly Symphony》는 1929~39년 사이 디즈니가 만든 75편의 “미키 마우징” 기법에 기반한 단편 만화영화 시리즈 『Silly Symphony』 중 1932년에 제작된 “3색 테크니컬러가 도입된 최초의 상업적인 풀컬러 영화” 「꽃과 나무들(Flowers and Trees)」을 원본으로 한 롤페인팅이 메인인 전시이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7분 50초 길이의 애니를 35미터 길이로 “ 돌려감기”한(혹은 풀어놓은) 기념비적인 크기의 오마주이다. 작가는 5살 무렵에 처음 보았던 디즈니 애니 「판타지아 2000」을 지금껏 300번을 되감기해서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 본 <꽃과 나무들>은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젊고 건강한 수나무와 플러팅 중인 암나무를 좋아하는 고목 수나무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숲에 불을 지르고 마침내 숲의 온갖 생명들의 공조로 불을 끄고 수나무는 암나무와 결혼한다는 그 말 많은, 그 뻔하게 속이는 해피엔딩의 구조로 만들어진, 납작한 서사로 만들어진 동화다. 1930년대의 대공황(Depression), 지구 행성이 토성의 정조로 뒤덮인 시대의 평범하고 가난하고 시시한 사람들이 즐긴 환타지 대본은 클래식 음악이 먼저 있거나 작곡되고 그것에 맞추어 대단히 정교하게 영상이 만들어지는 “미키 마우징”에 기반한다. “영상과 음향이 완전히 동기화된(synchronized)” 디즈니의 새로운 만화 영화를 미국의 대중문화산업을 비판했던 아도르노와 같은 지식인은 예술의 차이를 무화한다고 비판했지만, 매일매일이 생존을 위한 전쟁인, 미래는 올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은 즐겼다. 동물과 등급상 같은 단계에 속하는 아이들, 자기-삶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가능한 노동자들이나 서민들은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에 속았고 감탄했고 위로받았다. 단 한 명의 악당을 작인으로 짜여진 서사, 그러므로 선한 캐릭터들의 행복의 배경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고목(이미 죽은, 해골과 인접하는)은 작가의 롤 페인팅에서 중요하게 반복적으로 움짤화된다. 7분 50초라는 시간을 35미터라는 길이로 펴 늘이는, 커트로 잘리고 연결된 만화영화의 형식을 35미터 길이의 한 컷으로 필사하는 이 강박은, 5 살 아이의 원초적 경험에 대한 성인기 화가의 재해석이고, 새로운 자신만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대신 누구나의 혹은 1930년대의 텍스트를 차용하는 비행위적(inactive) 행위이고, 35미터의 “지속(duration)”(현상학적 몸의 미열이나 미동)으로 영화의 가짜-움직임(마비를 일으키는 시각적 교란)을 포획하는 수행이고, 무엇보다 어린이의 상태를 동경하는 어른들과 그외 기타등등으로서의 아이들에게는 귀여운 경험이다. 대문자 공황은 역사 속 과거가 되었지만 지금의 파국적 우울은 과거가 지나지 않았음을, 과거가 자꾸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는 “시간이 지난 것을 볼 때 빛이 바랬고 먼지가 쌓인 유토피아를 감각한다”든지 “먼지가 쌓이지 않은 것들에 먼지가 쌓인다”는 말을 좋아한다고 자신의 뒤집힌, 모순적인 이미지에의 취향을 설명했다. 유토피아는 너무 많이 써 먹혀서 닳았고 “먼지가 쌓인 유토피아”는 다시 작가가 덧붙인 “슬프면서 아름다운” 어떤 좋은 말/이미지여서 거부감 없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디즈니 형제는 자신들의 시리즈에 “어리석은(silly)”이란 형용사를 덧붙임으로써 성인인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표지했고, 그 말은 마치 “먼지가 쌓인 유토피아”란 마지막 유토피아의 형상들 중 하나를 경유해서 100년 후 이곳으로 귀환하면서 귀엽고 우울하고 위로하고 감탄하고 그러다가 결국 미래 없는 현상태(statusquo)로 돌아오는 시시한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연민, 그들과 함께 하는 자의 자조(自嘲)를 반영한다.
자신의 작업을 회화가 아니라 “색칠공부”라고 고쳐부르는, 미성숙한 유년기로의 반복적 퇴행을 아이들의 문화에 대한 충실한 인용을 통해 명민하게 지속 중인, 그러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온통 낡은/먼지가쌓인/스러지는 것들이 횡행하는 35 미터로 물질화한 이 작가가 견디는(suffering) 성년기, 내용 없는 성년기, 유년기를 도용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이 작가의 “움짤화(畵)”는 물론 21세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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