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put / 갈래머리 전시를 돌아보며

김성은 작가
April 17, 2024
Kaput / 갈래머리 전시를 돌아보며

Q1.

안녕하세요. 지난 2019년 갤러리조선에서 개인전 개최하신 이후, 5년 만에 한국에서 여는 개인전이라,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워, 영국에서 생활하시는 작가님께서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셨을 것도 같습니다. 5년 사이에 작가님 작업에도 많은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간, 신체,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시는 큰 줄기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2019년 개인전 작업이 공간 쪽에 무게가 실렸다면, 2024년 개인전은 신체, 이미지 쪽으로 다가가신 것 같습니다. 지난 전시가 공간 건축물이 중심이었다면, 이번 개인전은 신체 움직임 흔적을 이용해 만든 벽지와 재현된 여성 이미지가 중심으로 자리합니다. 중간 5년 간의 과정이 생략된 채 신작을 보게 될 한국의 관객 분들을 위해 그간의 변화에 대해 여쭙니다.

 

짧게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은데요. 5년 사이에 두 전시만 비교하면 뭔가 극적인 변화로 다가올 수 있지만, 사실 일부분은 점진적으로,  다른 일부분은 불연속적으로 반복되며 새로운 작업이 시작 된 거 같습니다. 사실 2019년 전시는 저에게 그동안 해왔던 건축적 성격의 프로젝트를 다시 돌아보며, 새로운 도전이 필요할 수 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시점의 전시라, 시작점이라고 보다는 그동안의 것들을 정리하는 마무리의 전시였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이번 전시는 건축을 발단으로 삼는 범주를 벗어난 것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저의 건축적 아쌍블라쥐를 기본으로 하는 예전 조소 작업은 건축의 언어와 구조를 재현이란 측면에서 보고, 기존의 잘 알고 있는 건축 이미지의 재구성을 통해 당연해 보이는 환경, 사람, 건축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상태, 주관적 흐름으로 탐구하였습니다. 공간의 변형이 기본이다 보니, 이때 작업들은 대부분 설계를 기반으로 이머시브 대규모 설치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 자원에 의해 제약이 있었고, 아이디어를 빨리 옮기는 속도감 있게 작업이 성격에 맞는 저에게는 항상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작은 모델 작업들은 광범위한 아이디어를 축소된 명제로 제시한다는 면에서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즉각적이지만, 종종 원래 시작점이었던 실제 환경과 거리가 먼, 밀폐된 추상 조각으로 오해 받을 소지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래서 다시 실제 공간에서 직접 작업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고, 주어진 환경의 건축적 조건을 컨텍스화 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주어진 환경, 소재, 역사와 그것을 사유 또는 반응하는 주관적 과정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주로 신체적) 행동과 제스처가 점점 더 중요한 주제가 된 것 같습니다.  

 

(판화라는매체를사용해벽지처럼응용한것은어떤의미가있는지, 회화적장르와신체의퍼포먼스공간의설치가작품에서어떻게연결되는지에관한대답입니다...)

 

 신체의 움직임 같은 우연적 순간을 드러내기 위해 서는 새로운 형태, 미디어 또 새로운 프로세스를 찾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제가 대학원에서 전공한 어찌 보면 사진과 회화 사이에 놓인 판화라는 매체는 흔적, 표현, 텍스처 같은 회화적 성격과 함께, 반복적 인쇄를 통한 기술적, 계획적 측면도 담고 있습니다. 작가의 신체의 움직임으로 기인한 추상적 이미지의 패턴들은 어떤 것은 화려하며, 장식적이기도 하고, 우발적 장난 같기도 하고, 또 매우 회화적인 이미지도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의 이미지를 공간화 되기 하기 위해 벽지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제스처의 방식과 특성은 피나 바우쉬, 이본 레이너와 같은 안무가들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몸의 움직임의 공간과 그 지속 시간이 사회적 경험에 얼마나 결정적인 인가를 이들의 퍼포먼스나 코레오그래피에서 배웠지만, 저는 퍼포먼스라는 장르를 피해, 오히려 몸을 직접 «보여주기» 보다는 고립과 파편화를 통해 오늘날 사회의 불투명하고 불 화음 적인 신체의 표현 방식과 논리를 지적하며,  더 넓은 원인과 결과의 체계에서 몸의 역할을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건축의 역사나 공간을 신체와의 관계의 레퍼런스로 쓰기보다, 이제는 스스로의 몸의 흔적을 통해 신체의 표현과 소비에 더 분명하게 관심이 집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지속적인 일련의 행동과 제스처로 보여지는 내 몸의 흔적은 대중매체, 미술사 등에서 발견되는 신체와 병치되어 새롭게 주제화 되고 있습니다.

 

Q2.

전시의 인상이 정돈되어 보이는 것과 달리, 의미는 다층적으로 얽혀 있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전시장 벽을 메운 ‘벽지’는 제스쳐를 담아내면서 동시에, 실크스크린으로 복제된 ‘이미지’이지만, 어느 것 하나 동일하지 않습니다. 잡지에서 찢겨진 여성 이미지는,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는 여성 이미지의 경우, 시체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 반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이미지의 경우, 공격적/방어적 시선을 보이고, 수동적인 포즈를 취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여유롭고 느긋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이미지의 병치가 불러일으키는 연상, 제목이 중의/다의적으로 읽힐 수 있는 점(영문, 불어 제목을 봤을 때), 찢기고 구겨진 잡지 이미지의 물성, 미술사의 참조점들, ‘남성적’ 앵포르멜과 추상 표현주의, ‘그림들’ 세대의 이미지 전유, abject 미술(갈색이 연상시키는 분변학), 페미니즘 미술 등도 떠오릅니다.

작가님은 이러한 다층적 의미망들을 통해 전시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요? (사실 이런 의미의 중첩에서 관객들은 작품으로부터 각자의 방식대로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니, 그건 관객들의 몫으로 남기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시고 싶은 최종 말씀이 있으실 수도 있어서 2번 질문 드렸습니다.)

 

현대미술에는 모순적인 역학관계가 존재합니다. 한편으로는 관객의 주체적 해석이 나날이 강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 생산과 관련해 업계 전반에서 생성되는 담론이 현대미술의 해석을 지배한다는 면에서 생기는 사이의 '긴장'이 그것입니다. 새로운 경험의 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냉소적이 되기 쉽지만, 그래도 예술가로서 뭔가 저는 예술 공간에 생산적인 무언가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면에서 관객에게 주체적 접근방법에 따라 다양한 질문, 해석 방향을 남기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질문하신 의미의 여러층의 레퍼런스의 '네트워크'는 저의 작품에서의 작가 스스로의 의도나 또 결론이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더 가치 있거나 통찰력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저의 자세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저는 관객을 작품 의미 형성의 동등한 존재로 여기며, 관객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내러티브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이 작품이 의도한 방식의 일부입니다. 저의 작업은 개념적, 시각적, 물리적, 감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남긴다고 나 할까요. 저는 작품을 통해 말하는 다른 '목소리'에 관심이 있으며, 이것이 단순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열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없이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겠지만요 :)

 

Q3.

(( 최근 이미지가 가장 활발히 생산, 유통되는 장소는 단연코 SNS입니다. 그렇기에 문화 전반에서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에서 SNS 공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SNS를 보는 시선으로 전시된 잡지의 여성 이미지를 보면 자아되취에 빠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또 다른 SNS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대중 문화 산업 뿐만 아니라, 최근의 이미지 생산과 작가님의 작업 대주제(공간, 신체, 이미지 사이의 상호 관계)는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생각해볼 수 있을까요? 혹은 이와 관련한 다른 생각이 있으신가요?

 

저도 소셜미디어를 이용하고 있고, 온라인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만큼, 이러한 이미지들이 저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인터넷의 '가상' 채널과 플랫폼 내에서 디지털 이미지와 비디오(데이터)의 유통은 익숙한 이미지 생산 및 유통 방식을 파괴하는 수많은 돌연변이를 일으킵니다. 소셜 미디어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방송할 수 있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으며, 인공지능에 의한 이미지 조작은 이전에는 숙련된 전문가만 가능했던 미디어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습니다. 또한 또 산업적으로 생산된 문화와 개인 만든 컨텐츠 문화 사이의 구분이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는 결정 적으로 이미지의 지위와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켰으며, 이미지는 더욱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존재로 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유동적 이미지들은 우리가 신체와 공간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변화 시치며, 욕망의 경제적 논리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 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 작업이 항상 주제화 하는 그 핵심적 논리 즉  이미지, 신체, 공간은 여러 가지 차원에 존재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심리가 영향을 받고, 결과적으로 시청자/소비자가 어디에 위치하는지가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셜 미디어에 진지하게 참여하려면 '가상' 에서 일어나는 일 뿐만 아니라 인터페이스, 다양한 기술이 '사용자'에게 부과하는 특별한 종류의 경험, 그리고 접근성과 기회의 문제 (전 세계 인구의 약 35%가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며, 접속한 인구 중 40% 미만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도 고려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