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안녕하세요, 그간 가까운 풍경들로부터 회화의 소재를 발견해온 작가님의 작업을 즐겁게 감상해왔습니다. 이번 개인전 《신선하고 뾰족한 가지》(2024)는 지난 2017년 개인전 《Very Green》 이후 7년만에 갤러리조선에서 열린 전시로서, 작가님께 의미하는 바가 클 것 같습니다. 두 전시 모두 작가님의 ‘주변’에 있는 대상을 관찰하고 회화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큰 맥락은 같지만, 구체적인 소재의 측면에서 차이점을 갖습니다. 먼저 2017년의 개인전은 ‘Very Green’이라는 제목 답게, 드라이브를 하며 보았던 작업실 근처의 논과 밭, 높고 낮은 산들을 그린 작업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같지만 다르고, 또 다르지만 같은 ‘초록’들에는 자연이 가진 여러 농도와 밀도가 담겨 있었지요. 이것을 보다 멀리 내다본 ‘거시적 풍경’이라고 한다면, 이번 개인전은 더 작고 가까운 것으로 시야를 좁힌 ‘미시적 풍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화병에 꽂힌 꽃, 동료와 지인과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신작은 먼 풍경으로부터 돌아와 다시금 가까운 것들에 주목하고자 하는 작가님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작업의 소재가 변화한 데에는 어떤 계기나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와 관련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작업의 소재나 약간의 기법의 변화는 늘 있어왔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주기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타인들은 잘 못 느낄지도 모르겠지만요. 저는 ‘그리기’ 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온 편입니다. 그렇다보니 항상 두리번두리번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왜 그리는가? 등등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 도구적 인간으로 살아온 지 오래다보니 무엇을 볼 때 느낄 때 그리는 인간으로서의 대답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합니다.
2017년 ‘Very Green'전 이후 저는 더 그러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대답으로서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할까요. 어쩌면 나이가 좀 들어가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질문보다는 대답을 하게 된 이유 말입니다. 이후 풍경시리즈 그림을 죽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초록풍경, 겨울풍경, 그리고 바다그림들까지. 이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숙원으로 갖고 있었던 꽃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졌습니다. ’꽃과 정물‘ 은 고전적 의미의 아름다운 소재로서 고래로 수많은 화가들이 그려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리기가 어려웠다고 말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꽃그림을 그려보기로 했습니다. 오랫동안 취미로 수집한 화기들에 대부분 나의 정원에서 온 꽃들을 꽂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쩐지 제 그림이라면 그래야할 것만 같았습니다. 소재로서의 인물들 역시 꽃과 화병을 대하는 자세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스스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생명체이기를 자각하며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질문과 대답을 하는 존재로서요. 이 질문지에 대답을 쓰고 있는 지금은 또 다른 변화의 기류에 있다고 말씀드려야할 거 같습니다. 마치 딱 그러고 싶은 때에 도래했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타인들은 잘 못 느낄지도 모르겠지만요.
Q2.
산과 같은 자연 풍경에서 인물과 꽃으로 옮겨간 회화의 소재는 넓게 보면 하나의 큰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유한하고 가변적인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풍경 또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듯 하지만 낮과 밤, 계절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은 시간 앞에 속수무책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보다 유한한 대상, 즉 ‘생명’을 가진 대상에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작가님께 있어서 그림 속 유한한 대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나아가 그림의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유한하고 가변적인 대상’ 적확하신 말씀이시네요. 맞습니다. 저는 어쩐지 그런 것들에게서 애정을 느끼고 제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또는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저 같은 인간은 도무지 다른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상에 모든 그런 것들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중 제게 말을 걸어오거나 질문을 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또는 가끔 빛나며 존재를 알리는 것만도 같습니다. 저는 얼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거나 그것들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수집하고 싶어집니다. 그곳에 저의 그림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Q3.
전시장의 지하에서 볼 수 있는 인물 및 꽃 작업과 다르게, 2층에는 기존에 책을 만들며 작업하셨던 ‘텍스트 페인팅’ 시리즈가 걸려있었습니다. 같은 간격을 둔 채 일렬로 걸린 텍스트 페인팅 시리즈를 보며 일정한 행간을 가진 시의 형태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작가님은 이번 전시와 동명의 책을 출간하시기도 했는데요,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온전한 이미지만으로 회화를 구성할 때와 텍스트가 더해질 때 발생하는 역학이 궁금합니다. 또한 하나의 화면에 담긴 텍스트와 이미지가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작업을 하시는 과정에서 둘 중 어느 것이 더 선행하게 되는지, 둘 사이의 간격을 좁히거나 넓히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여쭙습니다.
일명 <텍스트 페인팅>이라고 명명한 제게는 ‘놀이’같은 이 작업 시리즈는 2003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지속해오고 있는 작업이니 제가 가장 오래도록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같은 화면에 그림과 글이 같이 놓인 형식의 이 시리즈는 어눌한 글씨체가 박힌 어린아이의 포스터그림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포스터그림은 목적의식이 분명하다고 본다면 제 그림은 그 부분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과 글이 함께지만 그 둘의 상관관계는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그렇다고 또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기도 합니다. 글과 그림이 함께 놓인 화면을 동시에 대할 때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란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지점에 이 작업이 있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문학을 좋아한 사람이고, 작업에 많은 부분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어쩌면 결국 제가 하려는 것은 좀 거창하지만 궁극의 '시' 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시를 읽는 마음, 쓰는 마음 같은 것이 저의 작업의 밑천일 것이고, 제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글과 그림이 함께 하는 이 작업에서 어떤 것이 먼저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고, (혹은 책이나 곳곳에서 발견하여 줍기도 합니다.) 이미지가 먼저 구현되어지기도 합니다. (이미지 역시 지나가다가 발견하기도 합니다.) 또는 그 둘이 동시에 떠오르기도 하며, 또는 상관없을 것 같은 둘을 조합해보기도 합니다. 즉흥성을 양념으로 치면서 작업하다보니 만족스러운 결과가 되기도 하지만 폐기되는 작업 역시 종종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완성은 저도 모릅니다.에서 시작되는 작업이라고 할까요. 이 시리즈는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작업하지 않는 편인데 붓질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생생하게 화면에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에스키스나 드로잉은 아닙니다. 이상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슴슴하지만 담백하게 완성된 한 그릇의 국수 같은 그림이면 좋겠다 생각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