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OLES HAVE NO HAIR: 박보나

8 - 27 October 2019
  • Press Release Text

     

    0. 블랙홀은 머리털이 없다.
     
    별이 붕괴되면서 블랙홀이 만들어지는데, 우리가 볼 수 있는 블랙홀의 모습은 다 똑같이 그저 시커멓다. 사실 블랙홀도 질량, 회전을 하는 경우에는 각운동량, 전기에너지를 가진 경우에는 전기량이라는 각각의 특징이 있지만, 인간이 블랙홀 개체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회전하지 않는 블랙홀의 경우, 질량이 같은 두 블랙홀을 구분할 방법은 없다고 한다. 과학자 존 흴러는 이러한 블랙홀의 특징을 ‘블랙홀은 머리털이 없다’는 ‘머리털 없음 정리론’으로 설명했다. 머리털이 없어서 개성을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소리로 이해할 수 있다. 대충 보면 차이가 잘 보이지 않고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모든 사건은 멀리서 흘끗 보면 블랙홀처럼 그 차이와 관계가 드러나지 않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다른 것들이 보인다. 의외의 긴밀한 관계를 읽을 수도 있고, 반대로 세밀한 차이를 눈치챌 수도 있다. 박정희의 쿠테타와 베트남전 한국군 파병, 다방 인질극은 서로 개별적 사건처럼 보이지만 굵게 연결되어 있다. 반면, 실제 사건과 그에 대한 서술이나 해석, 그리고 재현 사이에는 언제나 미세한 틈이 존재한다.
     
    블랙홀은 머리카락이 없어서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 다른 블랙홀인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사건과 이미지들은 알고 보면 눈에 보이는 것과 사뭇 다르다. 그 차이가 보이기 시작하면 세계는 이전과 같지 않다.
     
    0. 이창동의 <버닝>
     
    영화 <버닝>의 주인공은 글을 쓴다.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먹고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정신적 이상과 물질적 필요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에게 각각의 세계를 대변하는 것 같은 두 인물이 나타난다. 둘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주인공은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 (정신이라고 하자)와 현실 세계(물질이라고 하자)의 중간 쯤에서 길을 잃는다. 두 세계는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서로 겹쳐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은 있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고,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은 가짜같다. 주인공은 예측이 안되는 여자를 찾을 수 없고, 속을 알 수 없는 남자가 취미처럼 태운다는 비닐 하우스도 찾을 수 없다. 주인공은 그의 세계가 실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하늘에서 요란하게 떨어지는 유성은 아무 때나 아무데로 떨어진다. 그렇게 우주에서 돌이 무심하게 떨어지는 동안에도 역사는 쓰여진다 (블랙홀1, (2019)).1961년 박정희가 일으킨 쿠테타는 한 동안 유행병처럼 번졌던 다방 인질극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관계가 있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미국이 벌이는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병한다. 한편 북베트남을 지지했던 북한은 대남 무장공세를 강화하면서 베트남전 파병국인 남한을 혼란에 빠트린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 특수부대원 31명을 침투시킨 사건도 그 중 하나였다. 이후 박정희는 안보 강화를 구실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훈련에 실제 무기와 총탄을 지급한다. 그래서 인질범들은 무기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들은 훔친 무기를 들고 다방을 무대로 인질극을 벌인다.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개인들의 불만은 인질극이라는 비정상적이고 극적인 방식으로 터져나온다. 영화 <버닝> 속 사건이나 인물처럼, 유성이 떨어지는 것과 쿠테타가 일어난 것, 그리고 인질극은 전혀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각 사건의 정신적 에너지와 물리적 움직임은 서로 뒤엉켜 이미지의 세계 안에서 기꺼이 연결된다. 다만 모든 것은 불완전한 인간들의 선택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서 만들어 낸 결과일 뿐이므로, 그 연결은 아주 예측 불가능하고 매우 변덕스럽다.
     
    0.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랜도>의 주인공 올랜도는 글을 쓰고 싶어하는 열망과 사랑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귀족 청년이다. 이 미남 주인공은 중간에 여자로 바뀌는데, 심지어 바뀐 성별로 수 백년을 더 살면서 계속 글을 쓴다. 여자가 된 올랜도가 런던의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느끼는 순간, 멀리서 야경꾼의 외침이 들린다. “서리 내리는 새벽 정각 열두시오” 버지니아 울프는 쓴다. 그래서 올랜도는 느낀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18세기가 끝이 났다. 19세기가 시작된 것이다.’라고. ‘서리 내리는 새벽 정각 열두시’는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블랙홀2 (2019)는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담고 있는 2채널 비디오 작업이다. 한 채널에서는 배우들이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네 가지 동작을 반복하고, 다른 한 채널에서는 배우들이 원형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자신들의 퍼포머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퍼포먼스는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피는 동작, 기도하며 눈치를 보는 동작, 우는 동작, 진압과 지시를 내리는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우들이 둘러 앉아 수다를 떠는 퍼포먼스는 역할과 동작이 달랐던 퍼포먼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배우와 작가의 관계, 연극과 미술의 차이에 대해 잡담을 나누며, 세계와 창작, 질서와 무질서에 대해 농담을 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배우들은 연기가 아닌 척하는 연기를 하는 동안 커피를 마시고 시간을 묻는 동작을 반복하는데, 커피는 끊임없이 채워지고 서로 맞지 않던 시간은 서서히 가까워진다. 시간을 대답하는 배우의 대사는 매번 똑같다. “서리 내리는 새벽 정각 열두시”. 우연과 계획, 실재와 창작, 역사와 이미지 등의 두 개의 대립된 세계가 작업 안에 공존 하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깨움의 순간이다.
     
    0.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 글을 쓰는 남자 주인공과 청부살인을 하는 여주인공은 하늘을 보다가 문득 달이 두 개인 것을 발견한다. 달이 두 개인 것을 깨닫는 순간, 주인공들은 그들이 속한 세계가 예전과 같지 않다고 느낀다. 허구일 수도 있고, 유일한 세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두 개의 달은 소설 속 허구의 세계와 소설 밖의 실제 세계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는 얼룩처럼 작동한다.
     
    이 책의 첫 페이지에 하루키는 해롤드 알랜 Harold Arlen과 에드가 이프 하버그E.Y. Harburg의 노래 <그것은 단지 종이달 It Is a Only a Paper Moon)일 뿐이야>의 구절을 옮겨 놓았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모두 다 진짜가 될거야’. 이 노래 가사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 혹은 이미지라는 재현의 세계의 셩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둣 하다. 동시에 실제 세계 속 사건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노래하는 것으로도 들린다.
     
    달처럼 세숫대야 속 물에 떠있는 공(블랙홀 4 (2019))은 전시장 안의 다른 작업 속 이미지이기도 하고, 블랙홀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혹은 이 세계나 우주 전체의 이미지라고 할 수도 있다. 물 속에 반사된 공의 환영이 실재와 일치하는 작위적 순간, 그리고 관객의 얼굴이 물 속에 비치는 순간, 전시장 안에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1Q84> 속 두 개의 달이 그랬던 것처럼, 까만 공들은 이미지 안의 세계와 바깥의 실제 세계 사이의 경계선을 더듬는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꿈인듯,진짜인듯. (블랙홀 3 (2019))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자세히 보면, 다른 것들이 보인다.
     
    박보나,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