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al of Mystery: 이호억

3 November - 23 December 2022
  • Overview
  • Works
  • Portal of Mystery 22.11.3 - 12.23

    이호억
  • Press Release Text
    저자 : 백필균
    제목 : 흰 정원과 검은 배 - 2023년 이호억에게 보내는 글
    삼전 1리에 이어 삼전 1리, 삼전 2리에 이어 삼전 2리. 충남 논산에 시내버스 안내음성은 같은 이름으로 다른 마을을 불렀다. 버스로 곧은 도로를 달려 도착한 1월의 종점은, 긴 숨을 돌린 겨울의 깊은 한낮이었다. 버스가 마지막 승객을 내리고 반환할 때 누군가 뜀걸음으로 떠나는 버스 뒤를 다급하게 뒤쫓았다. 그를 보지 못했을까, 버스는 지체없이 멀어졌다. 누군가는 우뚝 멈춰섰다. 두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어디선가 나타난 돌멩이가 몸 내부 어느 수면으로 떨어졌다. 마을을 지나는 버스 하나는 하루에 1회, 또 하나는 하루에 5회만 드물게 운행했으니 누군가는 지난 기다림을 다시 되감아야했다.
    길에서 혼자라는 감각은 내게 익숙했지만, 그날의 감각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나는 버스의 마지막 승객이었고, 마을에 남은 누군가와 같은 곳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마을 주민은 이곳이 충청과 전라, 도(道)와 도 경계와 가깝다고 알려주었다. 끊기지 않을 기세로 이어지는 길 중간에서 땅이 나뉘고 이름이 바뀐다고 말했다. 나는 도로를 등지고 계곡 사잇길을 향해 걸었다. 차가 다니지 못할 좁은 길로, 산까지 이어진 오르막길로 향했다. 사람이 다니는 길과 산짐승이 다니는 길이 교차하는 흔적을 지나 산 중턱에 다다랐다. 뒤돌아서자 한낮의 햇살이 계곡에 고였다.
    길가에 빈 울타리가 보였다. 이호억은 과거 울타리 안에 사슴 여럿이 살았다고 말했다. 긴목과 맑은 눈의 짐승은 능선에서 계곡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낮밤마다 견뎠을 것이다. 사슴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울타리 앞에서 사슴 대신 개 두 마리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개들은 내 몸에서 나는 도시의 탁한 냄새를 경계했다. 미안하지만 그 냄새를 지울 방법이 없었다. 개들의 우렁찬 짖음은 그들의 후각에서 내 것이 사라질 때까지 이어졌다.
    높은 천장 아래 공간은 운동기구 몇 가지가 놓여 어느 체육선수의 훈련실을 닮았다. 한쪽 벽에 유도복을 묵선으로 옮긴 그림 액자가 기대 있었고, 그와 가까운 곳에 텐트가 지어 있었다. 바닥에 놓인 종이뭉치는 최근까지 이곳에서 이호억이 작업한 흔적을 드러냈다.1)
     
    이호억은 2022년 논산과 서울, 흰 정원에 검은 배를 옮겼다. 인공연못에 세찬 빗줄기가 내렸고, 물둑은 알 수 없는 힘으로 무너졌다. 벽에 걸린 닥종이와, 바닥에 덮힌 광목으로 정원이 쏟아졌다. 돌과 물, 꽃과 풀이 공간에 나뒹굴었다.
    비인간의 생태계를 향하는 이호억에게, 전시는 늘 작업의 연장선이다. 야생으로 직접 나가서 사생하는 작업 방향과 반대로 전시라는 실천은 물과 흙을 머금은 호흡을 인간사회로 내뱉는다. 언듯 이호억의 작업과 대칭적으로 보이지만, 금강을 가로지르던 배가 도심에 나타난 범람은 태초부터 무한히 변화하는 세계의 본성이다. 이호억의 예술이 초기부터 최근까지 이어온 일련의 연작, 특히 ‘바람의 뼈’ 연작 가운데 ‘어떤 가능성’이라는 부제를 붙인 단일 작업에서 이호억이 능수능란하게 구성하는 필획의 변화는 세계의 본성을 닮은 움직임이다.
    정원에 밀려온 검은 배는 도심의 야영지에서 불타는 장작이자 밀려오는 홍수에서 버티는 방주이다. 긴 항주 끝에 숨고르며 또 다른 출발을 준비하는 시간. 배 주변에 기다랗고 구불구불한 광목 주머니가 공기 주입으로 팽창하고 수축하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연못 깊숙히 구겨진 응어리일까, 고동치는 노을2) 의 흉막일까. 광목에 수묵은 또 다른 세계로 도약하는 용의 자세를 취한다. 금강을 가로지르던 몸 밑, 두툼한 목재 더미와 부스러기에 산숲의 감각이 스민다. 정원 안과 바깥 세계가 맞닿아 얽힌다.
    하물며 자기 심장으로 숨쉬는 이호억의 걸음은 어디로 향할까. ‘스스로 달리는 나무’를 따라 정원 밖으로 내달린 필획은 보이지 않는 ‘검은 사슴’3) 의 그림자이다. 검은 사슴은 이호억의 자전적 서사에서 선산에 대한 기억을 매개하는 대상, 생의 여러 순간에 마주친 어려움과 고통, 그 너머에서 찾아헤매던 진실, 혹은 애초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이호억과 검은 사슴은 가깝지만 멀었다. 특정한 구름을 따라다니며 그림으로 남겼다는 이호억의 일화에서 구름은 검은 사슴과 위치를 교환한다. 하늘을 향해 뻗은 뿔은 무엇을 수신하려는 것일까. 작가는 흰 정원에 서서 세계의 응답을 요구하며 산천에 울부짖는다. ‘붉은 메아리’와 ‘푸른 메아리’라 지은 그림 제목에 기다림이 담겨있다. 그의 움직임과 소리에 상응하는 타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메아리의 시간을 끊임없이 지연하는 흰 정원에 붉은 노을이 스미고, 푸른 달이 떠오른다. 밤이 되어서야 어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돌멩이가 보인다. 잔잔한 수면을 흔들었던 돌멩이였다. 
     
    1) 작업실 뒷문 바깥으로는 석불의 두상을 닮은 조각이 매화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었고, 작업실 앞 장독대 뚜껑 위로 기하학적인 회색 조각이 무언가의 숙성을 지키는 자세로 놓여있었다.
    2) 이 글에서 노을은 해질녘 시간을 가리키는 동시에, ‘노을이 걸치는 산’이라는 논산의 옛 지명 ‘놀뫼’를 따라 이호억이 사는 공간을 지시한다.
    3) 한강 작가가 쓴 장편소설 「검은 사슴」(2017)에서의 차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