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ends: 박보나

3 - 24 July 2013
  • Press Release Text
    2’33’’ . 피아니스트는 갤러리에 앉아서, 간헐적으로 연주를 한다. 연주자는 사실, 꽤나 마음대로 연주를 한다: 연주를 거의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전시 기간 동안, 연주자는 그냥 거기에 앉아 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바틀비 Bartleby’와 다소 비슷하게, 연주자는 ‘안하는 것을 선호한다. I would prefer not to.’ 그리고, 연주자가 몸을 움직여 피아노를 잠깐 칠 때, - 마치 지루함에서 벗어나려는 듯 - 계속 반복되어 연주되는 듯하며, 무자크 Muzak가 되어 버린,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한다는 것에는, 무언가 가볍고, 심지어 습관적이며, 일상적인 면이 있다. 
     
    박보나는 미술과 삶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상당히 많이 하는데, 그것이 박보나 작업 전반의 주요한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이전의 공공 프로젝트 작업, 픽션 보다 낯선, 2011에서 작가는 서울의 거리에 퍼포먼스를 펼치는 시위자를 배치하고, 퍼포머는 시위자의 진심과 헌신이 드러나는 역할을 연기한다. 인터넷으로 시위자들을 찍은 사진 - 자신의 퍼포머를 포함한 - 을 모으면서, 작가는 다양한 추가적 경로를 통해 그 사진들을 유포한다. 실제 시위자로서의 퍼포머의 위치, 혹은 미술 작업으로서의 위치, 그리고, 구경거리로서의 시위자의 기록, 혹은 휴머니스트적인 다큐멘터리 이미지 사이에서 생기는 모호함은, 애매한 반응, 작업에서 보이는 행동에 대해 불편한 양면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미술은 매일의 삶 속에 존재하지만, 또한 점점 더 삶처럼 보인다; 삶은, 결과적으로, 미술처럼 보이게 되었다. 퍼포머가 그렇게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것이 지시 사항인지, 혹은 퍼포머가 연주를 거부하는 것인지, 퍼포먼스가 의도한대로 잘 되지 않는 건지, 혹은 일부로 편하게 치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픽션 보다 낯선에서 보이는 사람들이 작업인 것인지, 어려움과 시위의 진짜 분출인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형식의 미술도 일단 받아들인다면, 어떤 제스처가 진짜 상황인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만약 미술이 계속해서 매일의 삶을 모방한다면, 모든 제스처들이 결국에는 미술로 이해되거나, 심지어 오해될 위험성이 있지는 않을까? 삶을 닮은 미술은 실제의 삶을 가볍거나 우습게 만든다는 논쟁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엘리제를 위하여가 익숙한 곡이라는 건 확실하다. 이 곡이 연주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것을 기억해낼 수 있을 만큼, 전시장에 오래 머무른다면, 마치 계속 반복 연주되는 것처럼, 이 곡을 여러 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연주자는 갑작스럽게 연주를 하기도 하고, 가끔 부분적인 음을 내기도 한다). 픽션보다 낯선이 미술적 제스처와 시위의 소진을 보여줬던 것처럼, 엘리자를 위하여는, 그것이 연주될 때, 박보나의 작업2’33’’ 에서 닳아 없어진다. 우리는 그러한 반복이 ‘미술’을 ‘삶’으로 끌어내리면서, 모든 힘을 효과적으로 비워 낸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존 케이지가 ‘침묵’의 작품, 4’33”를 녹음했을 때, 심지어 엄청난 정적(무향실anechoic chamber), 미미한 소리조차 여전히 인지될 수 있었기 때문에 (퍼포머 데이비드 튜더 David Tudor는 계속 연주를 하고 있었다), 작업이 이루어졌다. 만약 엘리제를 위하여가 게으르게 반복되면서 비워진다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곡의 연주, 따분함의 퍼포먼스일 뿐이다: 우리는 건반 위에서 지루해 하는 손가락의 움직임, 피아니스트의 점점 더해지는 무료함, 퍼포먼스에 의해 변하는 음악의 감수성을 듣는다: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그의 책, 열린 작품에서 묘사한 음악에 대한 모든 작업의 열림으로 연결될 수 있다. (에코Eco는 궁극적으로 이 해석의 공간을 음악적 과정의 근본으로 묘사하지만, 작곡가들이 연주자에게 도전 의식과 자극을 주기 위해, 어떻게 그들의 음악에서 구조적으로 열린 요소를 남기기 시작하는지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2’33’’ 에서 박보나가 탐구하는 지점이다.) 
     
    검은 사각형도 비슷하게, 예술 작품의 열림을 탐구한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바닥에 놓여진 포스터 작업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이 작업에서( 5-10년 전에 매우 인기 있는 형식으로 쓰여서, 그 특별함이 비워진), 박보나는 표면적으로 인터넷에서 수집한 멸종 동물에 대한 다소 감정적인 묘사를 하면서, 포스터가 그 정치적인 기능으로  되돌아가도록 만든다. 관객들은 물론 포스터를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보통 웹 2.0의 긍정적인 - 회전 -  상호작용 안에서 체계화되는, 관객의 참여가 조장되지만, 관객은 온라인에서 가져온, 어둡고, 심지어 종말론적인 메세지를 마주하게 된다. 관객의 감정적인 참여는 아직 모호하다: 우리는 포스터의 텍스트가 무엇을 탐구하기를 원하는지 정말 상관하는가? 우리가 미술 작품에 기초해서 행동하는가? 작업을 집어드는 우리의 성실함은 심문을 받는 듯하며, 제스처로서, 잠재적인 가치를 가진 미술 작품으로서, 포스터를 집으로 가져가는 우리의 습관은, 곧  잃어버릴 과거라는 중심 메세지를 가진 작업에 대한 신체적인 참여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박보나의 작업 전반에서 드러나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재구성된다. 포스터가 줄어들면, 멸종 동물에 관한 기록도 공간에서 사라진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제도 안에서 작업하는 동안 이루어진, The Missing, 2009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에서, 박보나는 유사한 비가시성을 탐구한다. 이탈리아 비엘라에 위치한 피스톨레토 파운데이션에서 레지던시에 참여하는 동안, 비자 문제 때문에 레지던시 기간 보다 짧게 머물게 되는 결과가 작업으로 보여진다. 박보나는 레지던시에 실종된 여성에 관한 비디오를 만들겠다는 작업 계획서를 냈지만, 비자 문제로 전시가 열릴 때까지 작업과 함께 남아있을 수 없게 된다. 작가는  전시가 끝날 때까지, 비엘라에서 사라지는 것은 오직 작가 자신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박보나는 레지던시가 끝날 무렵 비엘라에서 실종되었고, 마치 포스터가 지금은 멸종된 동물의 텅 빈 흔적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흔적만 남게 된다.  포스터가 다 없어지든, 그렇지 않든간에 (그럴 가능성도 있다), 관객은 한계와 결핍을 인지하고, 작업과 그 제스처의 소진에 익숙해진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작업인 무제(사이)도 부재와 가시성의 또 다른 혼합을 보여준다: 마술과 환상. 여기서도 박보나는 ‘엔터테이너’ 직업과 ‘이민자’라는 정치적 신분을 대조적으로 놓는다: 프랑스인 마술사가 프랑스어 엑센트가 묻어나는 한국어로 설명을 하면서, 도구 없이 마술을 펼친다. 여기서 보이는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속임수 과정을 드러내는 능숙한 손의 제스처만 남고,  마술이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는 부재한다. 퍼포머는 도구로부터 관객의 주위를 돌리는데, 그가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 관객을 휘어 잡는 마술사로서 - 속임수로부터 나오는 아이디어가 아니다. 사실, 그가 드러내고 있는 것은, 마술의 메커니즘 자체와, 이민자이자 노동자로서 그의 신분이다. 마술은 물론, 인간의 시각, 빠른 속도에서 도구 너머의 행위를 감지하거나 볼 수 없는 능력의 한계에 대한 확장된 놀이이다. 마술사가 관객이 봐서는 안 되거나, 볼 수 없는 것으로부터 항상 관객의 시선을 돌린다면, 박보나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주의의 전환이 계속되지만, 그것은 마술사와 마술이라는 노동의 전면façade을 드러내기 위해 도치된다: 완결된 속임수를 지닌 마술의 혼란스러움을 걷어 내면서, 연습과 리허설이 드러나고, 관객을 위해 재연된다. 마술사가 퍼포먼스에 집중하는 동안, 관객은 도구가 없는 상황에서 그의 ‘이민자’로서의 신분을 좀 더 필연적으로 깨닫게 된다(그의 프랑스어 엑센트에서). 이민자의 우선적인 과제가 동화될 것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리허설은 외국어로 보여주는 정제된 환상의 퍼포먼스를 할 때, 퍼포머가 일하고 있는 성실함의 생산을 드러내준다. 우리는 우리가 일상의 페르소나와 좀 더 공식적인 노동, 두 가지 모두의 수행을 어떻게 권장받는 지를 본다. 
     
    박보나가 비엘라에서 했던 The Missing 작업에서 명백히 드러났던 이주에 대한 관심은, 이 작업에서 완전한 형태로 정교해진다. 박보나의 언어, 대화, 그리고, 퍼포먼스의 통합은, 언어의 권력과 우리의 이해 범주 밖에 있는 언어에 대한 인식을 다룬 이전 작업, Warning in Urdu (do not feed the pigeons), 2008와 연결되면서, The Missing에서 확장된다. 이 경우, Warning in Urdu는 일부 유럽인과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공포와, 아랍어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는 호전성에 대해 장난을 친다. (사실 이 문구는 명백히, 대중들에게 광장에서 새모이를 주지 말라고 요구하는 영국의 경고문을 드러내지만, 현수막으로서 불안감을 주는 형태를 띠고 있다.) 박보나가 거의 단순히 투사하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렇게 근거 없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가정은, 무제(사이)에서도 계속된다. 이 작업에서 퍼포머는 마술의 속임수가 매끄럽고 그럴 듯 하다면, 퍼포머는 그의 이국적인 특징과 더불어 관객을 즐겁게 해주겠지만, 성공적인 퍼포먼스 밖에서 퍼포머는 철저한 검토와 비평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박보나가 번역을 이용하는 것과 여러 언어를 보여주는 것은 타자의 지위에 대한 분명한 탐구이다. 
     
    박보나는 제스처들과, 그것의 소진과 한계에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킨다고 할 수 있다. 미술이 전형적으로, 요소들의 재구성을 통하여, 새로운 형태의 전체로서 새로운 방식의 보기를 제안하려고 하는 지점에서, 박보나의 단순한 제스처는 관객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가 3차원적 복제 시대의 아우라의 이동The Migration of the Aura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제스처의 역사와 그것의 변형. 여기에서 예술 작품은 물질적이고, 개념적으로 지속적인 변형 과정에 있는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작가가 사용하고 있는 전유의 거대한 제스처를 주장하려고 시도하지 않으면서, 각 작업을 다른 작가의 작업에 공공연히 연계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위대한 성취의 순간으로 떠받드는 이 우상적 작업들은 필연적으로 끌어들여져서, 변형되고, 위대함으로 승천하는 지점에서 종종 텅 비워진다. 박보나는 제스처의 변형을 보여주면서, 주로 표면에 계속해서 신경을 쓰는 시대에, 우리의 가시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던칸 울드리치 Duncan Wooldridge (작가, 필자,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