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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ing back on 《Whistlers》
Interview with Bona Park by Minju Lee갤러리조선, 박보나 인터뷰 질문지: 《블랙홀은 머리털이 없다》(2019), 《휘슬러스》(2024)
2019년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개인전 《블랙홀은 머리털이 없다》(이하 《블랙홀》)는 과학자 존 휠러가 설명하는 블랙홀의 특징에서 착안해, 겉보기에는 동일해 보이는 이미지와 사건들 속에 숨어 있는 차이와 관계를 드러낸 전시다. 역사적 사건, 영화와 소설의 장면, 배우들의 퍼포먼스 등 서로 다른 층위의 이미지들은 실제와 재현, 허구와 현실 사이의 미세한 틈을 가시화하며,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믿는 방식 자체에 질문을 던졌다.
한편, 2024년에 진행되었던 《휘슬러스》는 탈성매매 여성 지원 단체 ‘윙’과의 만남에서 출발해, 서로의 숨을 이어 부는 휘파람 퍼포먼스, 친구에게 보내는 손 편지, 함께 차린 밥상과 같은 구체적인 장면들을 통해 여성들의 우정과 정서적 연대를 전면에 놓은 전시였다. 《블랙홀》이 사건, 이미지, 서술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며 세계 인식의 균열을 보여주었다면, 《휘슬러스》는 그 균열 이후에 남는 자리, 즉 타인과 숨을 나누고 서로를 돌보는 관계의 장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전자가 의심과 경계를 짚어내는 작업에 가까웠다면, 후자는 우정과 친밀성, 그리고 관계를 연결하기 위한 실천에 가깝다.
이 두 전시를 가로지르는 박보나의 문제의식은 크게 두 갈래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며 믿어지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이 언제나 누군가의 노동과 제도, 사회적 관계와 얽혀 있다는 인식이다. 문제의식 자체는 유지되지만, 《블랙홀》에서 그것이 의심과 해체의 언어로 드러났다면 《휘슬러스》에서는 우정과 친밀성의 형식으로 표현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 박보나의 작업은 세계를 의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의심 이후에 남는 자리에서 어떤 태도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탐색해 온 과정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변화는 비판적 시선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보다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방식, 즉, 숨을 나누는 행위, 편지를 건네는 제스처, 함께 식탁에 앉는 시간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이 인터뷰는 두 전시 사이에 놓인 이러한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작가가 세계와 이미지,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다시 구성해 왔는지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 작가님의 작업에는 늘 ‘노동’이 중요한 층위로 등장해왔다. 《블랙홀》에서는 이미지 생산과 재현의 구조 속 노동이 드러났다면, 《휘슬러스》에서는 숨을 나누고 밥상을 차리는 행위가 또 다른 형태의 노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님에게 노동은 비판의 대상이기보다 관계를 구성하는 조건에 가까운 것인지, ‘노동’의 의미를 어떻게 접근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제가 처음 미술 제도 안의 노동에 대해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미술 작업과 전시가 작가 혼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생산된 이미지와 미술 작가를 둘러싼 신비화를 걷어내고, 미술 작업 역시 미술관 밖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생산 활동들처럼 구조적인 과정이며 다양한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저는 미술 산업 안팎의 노동자들, 그리고 이미지를 생산하고 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직업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주목했던 것은 노동과 직업이 한 사람의 서사와 역사를 설명해 줄 뿐 아니라, 작가인 저와 그들이 만나게 되는 계기로 작동하기도 하고, 미술 제도를 포함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 자체에 좀 더 초점을 두어 작업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미술 제도 안팎의 노동자들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저녁 장을 보거나 세탁을 하거나 소리를 만들거나 구두를 닦는 등 그들의 일에서 나타나는 동작들을 미술의 표현 형식 안으로 가져오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미술과 노동 사이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미술을 예술이라는 환상과 권위로부터 탈신비화하려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관습적인 미술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보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 《휘슬러스》에서는 탈성매매 여성 지원 단체 ‘윙’과의 만남을 통해 여성들의 우정과 숨, 밥상, 편지 같은 구체적인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미지와 사건의 틈을 드러내던 이전 작업에서, 실제 사람들과의 관계와 정서적 친밀함을 전면에 놓는 작업으로 이동하게 된 계기나 필요가 있었는지? 이 변화가 작가님 개인의 삶이나 글쓰기의 시간과도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이전 작업 보다 작업의 톤이 좀 더 친밀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위의 질문에서도 답했듯이 제 작업의 주제가 노동 자체라고 하기 보다 제가 미술 작업을 하면서 만나는 노동자들과 저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친밀함과 우정, 관계 맺기 같은 요소는 완전히 새롭게 추가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글쓰기는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가 글에서 늘 얘기하는 다정함과 연결성이 미술 작업에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더해서, 저와 제가 다루는 노동자나 인물 사이의 관계가 좀 더 관객의 것 (관객이 느끼는 친밀감과 연결성)으로 확장됐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에 작업의 톤이 부드러워진 것도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글을 쓰면서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고 싶다는 제 욕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글을 쓴 이후로, 글 뿐 아니라 제 미술 작업도 좀 더 마음의 영역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 두 전시 모두에서 ‘글쓰기’는 중요한 배경처럼 느껴진다. 《블랙홀》 시기의 글쓰기가 세계를 의심하고 분석하는 언어에 가까웠다면, 《휘슬러스》 이후의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편지나 시에 가까워진 듯 보이기도 한다. 작가님에게 글쓰기와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지 듣고 싶다.
글을 쓰면서 미술 작업과 분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글이 단순한 노동이었는데, 쓰다 보니 글은 제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표현 매체이고 세상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통로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제가 생각하는 미술의 성격에도 가깝기 때문에, 글과 미술을 따로 분리시키지 않고 서로 순환될 수 있는 작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 《휘슬러스》에서는 협업과 우정이 작업의 핵심 조건으로 등장합니다. 과거의 협업이 역할과 기능의 분담에 가까웠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신뢰와 정서적 친밀함이 더 전면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작가님에게 협업은 여전히 하나의 제작 방식인지, 아니면 세계를 이해하고 관계 맺는 하나의 태도에 가까운지, 작가님에게 ‘협업’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작업을 거듭하면서 협업이 관계 맺기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술 안팎에서 작업을 하면서 만난 분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저와 그분들이 만나서 같이 일을 하면서 서로 잘 되기를 바라는 한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다가왔습니다. 저에게 협업은 같이 일하는 분들 및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고, 제 작업에서 우정은 연결과 연대의 좀 더 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 휘파람을 이어 부는 숨, 손에 쥔 마음을 그린 <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비언어적, 정서적 형상들은 언어와 논리를 넘어서는 소통의 방식처럼 보인다. 과거 작업에서 언어와 서술, 구조적 비판이 중요했다면, 최근에는 몸짓과 감정, 다정함이 더 전면에 놓인 듯하다. 작가님에게 이러한 형식의 변화는 작업 태도의 전환이라기 보다 확장에 가까운 것인지, 혹은 전혀 다른 국면이라고 느끼시는지 궁금하다.
예전에도 퍼포머티브한 작업들을 해왔기 때문에, 이전 작업 보다 특별히 몸짓이 더 추가 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전 작업에서는 작업 속 인물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에 더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그 무게가 그 인물과 저의 관계로 조금 더 옮겨 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관계가 작업을 보는 관객들에게 까지 확장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좀 더 가깝게 서는 동작들과 다정함의 감정이 더 드러난 것 같기도 합니다.
- 《휘슬러스》에서 숨을 나누는 행위, 손 편지, 함께 차린 밥상과 같은 장면들은 친밀함과 돌봄을 구체적인 형식으로 드러내는 요소처럼 보인다. 최근 작업에서 다정함이나 친밀함이 하나의 감정에 머무르기보다 관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오늘날 돌봄과 친밀함이 ‘노동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논의도 활발한데, 작가님에게 ‘돌본다’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정서에 가까운지, 아니면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태도에 가까운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의 교환과 유지가 작업 안에서 하나의 생산 행위 혹은 정서적 노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예술의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계신지도 듣고 싶다.
친척 어른 중에 혼자 사시는 치매 노인이 있어서, 가끔 돌봄을 하러 지방에 내려갑니다. 그분을 돌보면서 생각한 것은 돌봄은 친밀함과 인내를 요구하는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요양보호사 선생님에게 돌봄은 분명히 노동이지만, 돌봄 자체가 기계적인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친밀한 정서적 노력이 없다면 서로 힘들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돌봄은 단순히 경제적 노동이나 의도적인 의무라고 하기 보다, 사회적 관계와 책임을 실천 하는, 즉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우정을 느끼는 정서적인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돌본다’는 행위는 어느 한쪽으로만 설명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에서 출발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만나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제 작업에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작업을 완성하겠다고 같이 마음을 모으는 과정이 중요한데, 저는 그것을 단순히 조사나 기록이라고 하기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과정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돌봄도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행되는 태도인 것 같다고 느낍니다.
예술에서 돌봄을 주제로 가지고 온다면, 돌봄이라는 행위가 만들어 내는 더 다양한 어휘들과 확장된 가능성과 해석을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여러 가능성들에 존재들 사이의 넓고 복잡한 연결성과 그들이 공유하는 세계의 지속성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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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고 뾰족한 가지' 전시를 돌아보며
노석미 작가 인터뷰 : 독립기획자 모희Q1. 안녕하세요, 그간 가까운 풍경들로부터 회화의 소재를 발견해온 작가님의 작업을 즐겁게 감상해왔습니다. 이번 개인전 《신선하고 뾰족한 가지》(2024)는 지난 2017년 개인전 《Very Green》 이후 7년만에 갤러리조선에서 열린 전시로서, 작가님께 의미하는 바가 클 것 같습니다. 두 전시 모두 작가님의 '주변'에 있는 대상을 관찰하고 회화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큰 맥락은 같지만, 구체적인 소재의 측면에서 차이점을 갖습니다. 먼저 2017년의 개인전은 'Very Green'이라는 제목 답게, 드라이브를 하며 보았던 작업실 근처의 논과 밭, 높고 낮은 산들을 그린 작업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같지만 다르고, 또 다르지만 같은 '초록'들에는 자연이 가진 여러 농도와 밀도가 담겨 있었지요. 이것을 보다 멀리 내다본 '거시적 풍경'이라고 한다면, 이번 개인전은 더 작고 가까운 것으로 시야를 좁힌 '미시적 풍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화병에 꽂힌 꽃, 동료와 지인과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신작은 먼 풍경으로부터 돌아와 다시금 가까운 것들에 주목하고자 하는 작가님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작업의 소재가 변화한 데에는 어떤 계기나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와 관련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작업의 소재나 약간의 기법의 변화는 늘 있어왔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주기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타인들은 잘 못 느낄지도 모르겠지만요. 저는 '그리기' 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온 편입니다. 그렇다보니 항상 두리번두리번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왜 그리는가? 등등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 도구적 인간으로 살아온 지 오래다보니 무엇을 볼 때 느낄 때 그리는 인간으로서의 대답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합니다.
2017년 'Very Green'전 이후 저는 더 그러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대답으로서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할까요. 어쩌면 나이가 좀 들어가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질문보다는 대답을 하게 된 이유 말입니다. 이후 풍경시리즈 그림을 죽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초록풍경, 겨울풍경, 그리고 바다그림들까지. 이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숙원으로 갖고 있었던 꽃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졌습니다. '꽃과 정물' 은 고전적 의미의 아름다운 소재로서 고래로 수많은 화가들이 그려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리기가 어려웠다고 말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꽃그림을 그려보기로 했습니다. 오랫동안 취미로 수집한 화기들에 대부분 나의 정원에서 온 꽃들을 꽂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쩐지 제 그림이라면 그래야할 것만 같았습니다. 소재로서의 인물들 역시 꽃과 화병을 대하는 자세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스스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생명체이기를 자각하며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질문과 대답을 하는 존재로서요. 이 질문지에 대답을 쓰고 있는 지금은 또 다른 변화의 기류에 있다고 말씀드려야할 거 같습니다. 마치 딱 그러고 싶은 때에 도래했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타인들은 잘 못 느낄지도 모르겠지만요.
Q2. 산과 같은 자연 풍경에서 인물과 꽃으로 옮겨간 회화의 소재는 넓게 보면 하나의 큰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유한하고 가변적인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풍경 또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듯 하지만 낮과 밤, 계절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은 시간 앞에 속수무책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보다 유한한 대상, 즉 '생명'을 가진 대상에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작가님께 있어서 그림 속 유한한 대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나아가 그림의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유한하고 가변적인 대상' 적확하신 말씀이시네요. 맞습니다. 저는 어쩐지 그런 것들에게서 애정을 느끼고 제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또는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저 같은 인간은 도무지 다른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상에 모든 그런 것들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중 제게 말을 걸어오거나 질문을 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또는 가끔 빛나며 존재를 알리는 것만도 같습니다. 저는 얼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거나 그것들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수집하고 싶어집니다. 그곳에 저의 그림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Q3. 전시장의 지하에서 볼 수 있는 인물 및 꽃 작업과 다르게, 2층에는 기존에 책을 만들며 작업하셨던 '텍스트 페인팅' 시리즈가 걸려있었습니다. 같은 간격을 둔 채 일렬로 걸린 텍스트 페인팅 시리즈를 보며 일정한 행간을 가진 시의 형태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작가님은 이번 전시와 동명의 책을 출간하시기도 했는데요,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온전한 이미지만으로 회화를 구성할 때와 텍스트가 더해질 때 발생하는 역학이 궁금합니다. 또한 하나의 화면에 담긴 텍스트와 이미지가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작업을 하시는 과정에서 둘 중 어느 것이 더 선행하게 되는지, 둘 사이의 간격을 좁히거나 넓히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여쭙습니다.
일명 <텍스트 페인팅>이라고 명명한 제게는 '놀이'같은 이 작업 시리즈는 2003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지속해오고 있는 작업이니 제가 가장 오래도록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같은 화면에 그림과 글이 같이 놓인 형식의 이 시리즈는 어눌한 글씨체가 박힌 어린아이의 포스터그림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포스터그림은 목적의식이 분명하다고 본다면 제 그림은 그 부분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과 글이 함께지만 그 둘의 상관관계는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그렇다고 또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기도 합니다. 글과 그림이 함께 놓인 화면을 동시에 대할 때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란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지점에 이 작업이 있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문학을 좋아한 사람이고, 작업에 많은 부분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어쩌면 결국 제가 하려는 것은 좀 거창하지만 궁극의 '시' 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시를 읽는 마음, 쓰는 마음 같은 것이 저의 작업의 밑천일 것이고, 제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글과 그림이 함께 하는 이 작업에서 어떤 것이 먼저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고, (혹은 책이나 곳곳에서 발견하여 줍기도 합니다.) 이미지가 먼저 구현되어지기도 합니다. (이미지 역시 지나가다가 발견하기도 합니다.) 또는 그 둘이 동시에 떠오르기도 하며, 또는 상관없을 것 같은 둘을 조합해보기도 합니다. 즉흥성을 양념으로 치면서 작업하다보니 만족스러운 결과가 되기도 하지만 폐기되는 작업 역시 종종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완성은 저도 모릅니다.에서 시작되는 작업이라고 할까요. 이 시리즈는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작업하지 않는 편인데 붓질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생생하게 화면에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에스키스나 드로잉은 아닙니다. 이상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슴슴하지만 담백하게 완성된 한 그릇의 국수 같은 그림이면 좋겠다 생각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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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머리 전시를 돌아보며
김성은 작가Q1. 안녕하세요. 지난 2019년 갤러리조선에서 개인전 개최하신 이후, 5년 만에 한국에서 여는 개인전이라,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워, 영국에서 생활하시는 작가님께서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셨을 것도 같습니다. 5년 사이에 작가님 작업에도 많은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공간, 신체,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시는 큰 줄기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2019년 개인전 작업이 공간 쪽에 무게가 실렸다면, 2024년 개인전은 신체, 이미지 쪽으로 다가가신 것 같습니다. 지난 전시가 공간 건축물이 중심이었다면, 이번 개인전은 신체 움직임 흔적을 이용해 만든 벽지와 재현된 여성 이미지가 중심으로 자리합니다. 중간 5년 간의 과정이 생략된 채 신작을 보게 될 한국의 관객 분들을 위해 그간의 변화에 대해 여쭙니다.
짧게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은데요. 5년 사이에 두 전시만 비교하면 뭔가 극적인 변화로 다가올 수 있지만, 사실 일부분은 점진적으로, 다른 일부분은 불연속적으로 반복되며 새로운 작업이 시작 된 거 같습니다. 사실 2019년 전시는 저에게 그동안 해왔던 건축적 성격의 프로젝트를 다시 돌아보며, 새로운 도전이 필요할 수 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시점의 전시라, 시작점이라고 보다는 그동안의 것들을 정리하는 마무리의 전시였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이번 전시는 건축을 발단으로 삼는 범주를 벗어난 것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저의 건축적 아쌍블라쥐를 기본으로 하는 예전 조소 작업은 건축의 언어와 구조를 재현이란 측면에서 보고, 기존의 잘 알고 있는 건축 이미지의 재구성을 통해 당연해 보이는 환경, 사람, 건축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상태, 주관적 흐름으로 탐구하였습니다. 공간의 변형이 기본이다 보니, 이때 작업들은 대부분 설계를 기반으로 이머시브 대규모 설치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 자원에 의해 제약이 있었고, 아이디어를 빨리 옮기는 속도감 있게 작업이 성격에 맞는 저에게는 항상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작은 모델 작업들은 광범위한 아이디어를 축소된 명제로 제시한다는 면에서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즉각적이지만, 종종 원래 시작점이었던 실제 환경과 거리가 먼, 밀폐된 추상 조각으로 오해 받을 소지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래서 다시 실제 공간에서 직접 작업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고, 주어진 환경의 건축적 조건을 컨텍스화 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주어진 환경, 소재, 역사와 그것을 사유 또는 반응하는 주관적 과정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주로 신체적) 행동과 제스처가 점점 더 중요한 주제가 된 것 같습니다.
(판화라는 매체를 사용해 벽지처럼 응용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회화적 장르와 또 신체의 퍼포먼스 또 공간의 설치가 작품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한 대답)
신체의 움직임 같은 우연적 순간을 드러내기 위해 서는 새로운 형태, 미디어 또 새로운 프로세스를 찾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제가 대학원에서 전공한 어찌 보면 사진과 회화 사이에 놓인 판화라는 매체는 흔적, 표현, 텍스처 같은 회화적 성격과 함께, 반복적 인쇄를 통한 기술적, 계획적 측면도 담고 있습니다. 작가의 신체의 움직임으로 기인한 추상적 이미지의 패턴들은 어떤 것은 화려하며, 장식적이기도 하고, 우발적 장난 같기도 하고, 또 매우 회화적인 이미지도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의 이미지를 공간화 되기 하기 위해 벽지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제스처의 방식과 특성은 피나 바우쉬, 이본 레이너와 같은 안무가들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몸의 움직임의 공간과 그 지속 시간이 사회적 경험에 얼마나 결정적인 인가를 이들의 퍼포먼스나 코레오그래피에서 배웠지만, 저는 퍼포먼스라는 장르를 피해, 오히려 몸을 직접 «보여주기» 보다는 고립과 파편화를 통해 오늘날 사회의 불투명하고 불 화음 적인 신체의 표현 방식과 논리를 지적하며, 더 넓은 원인과 결과의 체계에서 몸의 역할을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건축의 역사나 공간을 신체와의 관계의 레퍼런스로 쓰기보다, 이제는 스스로의 몸의 흔적을 통해 신체의 표현과 소비에 더 분명하게 관심이 집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지속적인 일련의 행동과 제스처로 보여지는 내 몸의 흔적은 대중매체, 미술사 등에서 발견되는 신체와 병치되어 새롭게 주제화 되고 있습니다.
Q2. 전시의 인상이 정돈되어 보이는 것과 달리, 의미는 다층적으로 얽혀 있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전시장 벽을 메운 ‘벽지’는 제스쳐를 담아내면서 동시에, 실크스크린으로 복제된 ‘이미지’이지만, 어느 것 하나 동일하지 않습니다. 잡지에서 찢겨진 여성 이미지는,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는 여성 이미지의 경우, 시체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 반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이미지의 경우, 공격적/방어적 시선을 보이고, 수동적인 포즈를 취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여유롭고 느긋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이미지의 병치가 불러일으키는 연상, 제목이 중의/다의적으로 읽힐 수 있는 점(영문, 불어 제목을 봤을 때), 찢기고 구겨진 잡지 이미지의 물성, 미술사의 참조점들, ‘남성적’ 앵포르멜과 추상 표현주의, ‘그림들’ 세대의 이미지 전유, abject 미술(갈색이 연상시키는 분변학), 페미니즘 미술 등도 떠오릅니다.
작가님은 이러한 다층적 의미망들을 통해 전시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요? 사실 이런 의미의 중첩에서 관객들은 작품으로부터 각자의 방식대로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니, 그건 관객들의 몫으로 남기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시고 싶은 최종 말씀이 있으실 수도 있어서 2번 질문 드렸습니다.
현대미술에는 모순적인 역학관계가 존재합니다. 한편으로는 관객의 주체적 해석이 나날이 강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 생산과 관련해 업계 전반에서 생성되는 담론이 현대미술의 해석을 지배한다는 면에서 생기는 사이의 '긴장'이 그것입니다. 새로운 경험의 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냉소적이 되기 쉽지만, 그래도 예술가로서 뭔가 저는 예술 공간에 생산적인 무언가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면에서 관객에게 주체적 접근방법에 따라 다양한 질문, 해석 방향을 남기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질문하신 의미의 여러층의 레퍼런스의 '네트워크'는 저의 작품에서의 작가 스스로의 의도나 또 결론이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더 가치 있거나 통찰력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저의 자세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저는 관객을 작품 의미 형성의 동등한 존재로 여기며, 관객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내러티브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이 작품이 의도한 방식의 일부입니다. 저의 작업은 개념적, 시각적, 물리적, 감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남긴다고 나 할까요. 저는 작품을 통해 말하는 다른 '목소리'에 관심이 있으며, 이것이 단순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열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없이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겠지만요 :)
Q3. 최근 이미지가 가장 활발히 생산, 유통되는 장소는 단연코 SNS입니다. 그렇기에 문화 전반에서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에서 SNS 공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SNS를 보는 시선으로 전시된 잡지의 여성 이미지를 보면 자아되취에 빠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또 다른 SNS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대중 문화 산업 뿐만 아니라, 최근의 이미지 생산과 작가님의 작업 대주제 (공간, 신체, 이미지 사이의 상호 관계)는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생각해볼 수 있을까요? 혹은 이와 관련한 다른 생각이 있으신가요?
저도 소셜미디어를 이용하고 있고, 온라인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만큼, 이러한 이미지들이 저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인터넷의 '가상' 채널과 플랫폼 내에서 디지털 이미지와 비디오(데이터)의 유통은 익숙한 이미지 생산 및 유통 방식을 파괴하는 수많은 돌연변이를 일으킵니다. 소셜 미디어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방송할 수 있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으며, 인공지능에 의한 이미지 조작은 이전에는 숙련된 전문가만 가능했던 미디어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습니다. 또한 또 산업적으로 생산된 문화와 개인 만든 컨텐츠 문화 사이의 구분이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는 결정 적으로 이미지의 지위와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켰으며, 이미지는 더욱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존재로 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유동적 이미지들은 우리가 신체와 공간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변화 시치며, 욕망의 경제적 논리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 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 작업이 항상 주제화 하는 그 핵심적 논리 즉 이미지, 신체, 공간은 여러 가지 차원에 존재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심리가 영향을 받고, 결과적으로 시청자/소비자가 어디에 위치하는지가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셜 미디어에 진지하게 참여하려면 '가상' 에서 일어나는 일 뿐만 아니라 인터페이스, 다양한 기술이 '사용자'에게 부과하는 특별한 종류의 경험, 그리고 접근성과 기회의 문제 (전 세계 인구의 약 35%가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며, 접속한 인구 중 40% 미만은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도 고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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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파 림파》 전시를 돌아보며
신현정작가와 인터뷰Q1. 안녕하세요. 우선, 이번 갤러리조선에서 열린 《림파 림파》 전시의 경우, 지하를 가득 메운 회화 설치 작업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이 작업이 인상적인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 작가님의 이전 전시와 달리, 보다 회화를 공간으로 확장하고자 한 의도가 보이며, 이전 작품과 달리, 회화 표면에서 작가의 의도, 개입보다 물질이 서로 반응해가며 만들어가는 표면 쪽에 보다 무게가 실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항 끝에 다다르는 투명함〉이나, 〈중심으로부터〉와 같은 작업의 경우, 작가의 구성, 직물과 화면을 배치하고자 한 의도가 보이는 반면, 이번 회화 설치 작업의 경우, 그 의도가 덜 개입된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노트의 “초기 작업이 자신과 환경의 관계를 홀로 마주하고 표현한 것이었다면, 점점 타인의 몸, 인간 외 생명체, 이 모든 것을 연결하고 있는 공간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대면하는 것으로 관심사가 옮겨지고 있다”는 설명이 이번 전시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회화를 이루는 기본 구조를 표면과 지지대로 보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전개해 왔습니다. 지하 갤러리의 메인 작업인 <500만년만에 펼쳐진 몸>은 갤러리 공간 구조를 지지대 삼아 회화의 표면이 자리를 잡아가며 3차원으로 확장된 설치로 구현되었습니다. 프레임 작업과 더불어 발전시켜 온 설치는 2018년 <적응과 회피의 메들리- color you can eat and sweat>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요, 이때부터 시각과 촉각이 합쳐진 ‘촉지적’ 경험을 일으키는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다양한 장소에서 크고 작은 설치 작업을 보여왔는데, 이번 개인전에서는 규모를 키워 공간 전체를 ‘회화의 장’으로 확장시키는 의도를 가지고 작업을 구성하였습니다. 특히 관람자가 작업속을 거닐며 몸의 감각으로 경험하도록 마치 촘촘한 미로처럼 동선을 디자인했어요. 처음으로 전시장 모델도 만들며 꽤 오랜 시간 고민하고 계획하여 준비했습니다. 지하 전시장 천장에 못을 박지 못하는 조건이어서, 벽에 설치할 스테인리스 스틸 손잡이를 개조한 구조를 고안해내는 과정도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변형과 독과 시>의 경우, 관람자가 완전히 회화의 표면 속에 둘러싸여 ‘녹아드는’ 경험을 상상하며 텐트 같은 형태로 만들게 되었어요.
설치 작업의 바탕을 이루는 유연한 천(표면)은 주로 다양한 수성 재료- 아크릴, 잉크, 천연/인공 염료 등으로 색이 입혀집니다. 저에게 염색하는 행위는 붓이나 다른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물질을 다루고, 머리에서 벗어나 몸의 감각과 움직임에 집중하는 과정입니다. 또한 물의 작용을 통해 색이 천에 스며 들고 무늬와 흔적들 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내맡김의 시간, 주체를 내려놓는 행위가 중요해요. 천, 염료, 물의 작용으로 생겨 난 무늬와 흔적들은 그저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정묘하고 때론 원시적인 느낌마저 들게 하는데, 거시적 혹은 미시적으로 바라본 생명체와 자연의 신비로운 자기조직화 작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업의 주요 재료인 멀베리(뽕나무잎), 아크릴, 락스(탈색 작용)는 각각 천연, 인공, 독성 성분을 내포하고, 삶의 환경에서 피부로, 호흡기로, 소화기로 들어오는 흔한 구성 요소들을 소환합니다. 물질들은 세포와 반응하고 변형되어 다시 배출되는 과정에서 우리 몸과 구분이 사라집니다. 이런 과정을 떠올리며 물질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감각적 느낌을 일깨우고, 완성된 작업의 표면이 마치 자신의 피부의 연장선인 듯 상상해 보게 하고 싶어요. 거대하지만 부드러운 작업을 마주하면 그 순간만큼은 몸의 한계- 크기, 부피, 시간-을 넘어서고 공간과의 접촉면을 넓힐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관람자 또한 자신이 마주한 물질과 환경에 깨어나 상호연결성을 느끼고, 공동의 장 속에서 확장된 주체를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Q2. 시대마다, 작가마다 회화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해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그린버그의 ‘평면성’ 같은 사례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회화에 관한 탐구를 내적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 표면 바깥으로 확장하고, 관계 맺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네트워크’란 단어가 현대 미술 실천의 많은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정말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회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작가 고유의 어법, 세계관, 이야기 등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무엇과 관계 맺고, 어느 방향으로 확장해 나가는지에 따라 작가마다 풀어내는 이야기가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님은 날씨와 계절처럼 피부, 신체를 통해 촉각적으로 감각하게 되는 ‘환경’을 탐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님이 다루시는 ‘환경’은 어떤 식으로 확장해 나가셨나요?
처음 <날씨 회화>를 시작했을 때, 개인적인 몸의 예민함, 아토피, 냉난방 시설이 없는 작업실, 그리고 너무나 강렬한 한국의 여름과 겨울의 경험이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어요. 오랜 시간 요가나 명상을 수련하면서 현재에 깨어 있기 위해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 방향성이 자연스럽게 작업에서 드러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캔버스나 천 등이 마치 피부처럼 느껴지고 환경을 마주하는 몸의 감각을 기록하는 표면으로 다루게 되었어요. 몇 차례의 계절이 지나며 <Sun Drawing>, <물과 철>, <하드보일드 티>등의 시리즈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전통적인 캔버스 회화 프레임에서 벗어나 ‘표면과 지지대’ 구조 안에서 자유롭게 다양한 재료와 방식으로 실험하게 되었습니다. 4번의 레지던시 경험을 통해서 작업 환경이 바뀔 때 마다 그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새로운 시작점으로 삼기도 했어요. 초기에는 현대 예술에서 회화가 살아남기 위해 프레임 속 이상향에만 갇혀 있기보다 삶과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2019년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했을 당시, 근처 방직 공장에서 폐기되는 옷감을 얻을 수 있었어요. 날씨와 계절에 관련된 작업이 충분히 전개되고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였는데 이 후 재료적으로 더 확장되고, 염색한 천을 이용한 공간적 설치를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특히 옷와 관련된 천을 다루며 신체성, 나 이외 다른 존재의 몸들, 공간 속에서 몸의 경험이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이고 앞으로 더 주목해야 할 방향이라는 자각이 생겼습니다. 제 작업은 ‘회화’라는 오래된 매체에 대한 애정과, 삶의 여정에서 마주한 환경과 경험 사이에서 만들어져 왔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예상치 못한 만남들이 불러올 변화 또한 기대하고 있습니다.
Q2-1. 최근에는 한발짝 더 나아가, 《림파 림파》 전시의 경우, ‘환경’을 생산하신 것으로도 보입니다. 작가님은 작업을 통해 어떤 ‘환경’을 생산하고자 하셨나요?
1의 답변에 어느정도 설명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규모가 있는 설치였기 때문에 작업실에서 상상하고 의도했던 것과 달리, 전시장에 직접 구현된 작업 속에서 사람들의 반응 속에서 깨달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작가님의 “탐욕스럽지 않게 거대하고 다채로운 색과 면의 회화 또는 건축” 이라는 피드백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부드럽고 투명한, 피부에 닿을 듯한 물의 흔적들 속에서 즉각적으로 몸의 감각에 깨어나고 현재의 순간을 마주할 수 있는 환경이길 바랬습니다. <변형과 독과 시>안에서 두 번에 걸쳐 진행한 소규모 명상 워크숍 <녹아들기(Melting)>도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함께 현재에 머물고, <500만년 만에 펼쳐진 몸>사이를 침묵 속에 걸으며 몸과 연결된 공간, 회화 그리고 물질에 대한 내밀한 경험들을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작업이 만든 환경 안에서 사람들과 깊이 교감할 수 있었던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