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oking back on 《Whistlers》

Interview with Bona Park by Minju Lee
March 31, 2026
Looking back on 《Whistlers》

갤러리조선, 박보나 인터뷰 질문지: 《블랙홀은 머리털이 없다》(2019), 《휘슬러스》(2024)

 

2019년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개인전 《블랙홀은 머리털이 없다》(이하 《블랙홀》)는 과학자 존 휠러가 설명하는 블랙홀의 특징에서 착안해, 겉보기에는 동일해 보이는 이미지와 사건들 속에 숨어 있는 차이와 관계를 드러낸 전시다. 역사적 사건, 영화와 소설의 장면, 배우들의 퍼포먼스 등 서로 다른 층위의 이미지들은 실제와 재현, 허구와 현실 사이의 미세한 틈을 가시화하며,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믿는 방식 자체에 질문을 던졌다.

 

한편, 2024년에 진행되었던 《휘슬러스》는 탈성매매 여성 지원 단체 ‘윙’과의 만남에서 출발해, 서로의 숨을 이어 부는 휘파람 퍼포먼스, 친구에게 보내는 손 편지, 함께 차린 밥상과 같은 구체적인 장면들을 통해 여성들의 우정과 정서적 연대를 전면에 놓은 전시였다. 《블랙홀》이 사건, 이미지, 서술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며 세계 인식의 균열을 보여주었다면, 《휘슬러스》는 그 균열 이후에 남는 자리, 즉 타인과 숨을 나누고 서로를 돌보는 관계의 장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전자가 의심과 경계를 짚어내는 작업에 가까웠다면, 후자는 우정과 친밀성, 그리고 관계를 연결하기 위한 실천에 가깝다.

 

이 두 전시를 가로지르는 박보나의 문제의식은 크게 두 갈래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며 믿어지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이 언제나 누군가의 노동과 제도, 사회적 관계와 얽혀 있다는 인식이다. 문제의식 자체는 유지되지만, 《블랙홀》에서 그것이 의심과 해체의 언어로 드러났다면 《휘슬러스》에서는 우정과 친밀성의 형식으로 표현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 박보나의 작업은 세계를 의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의심 이후에 남는 자리에서 어떤 태도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탐색해 온 과정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변화는 비판적 시선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보다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방식, 즉, 숨을 나누는 행위, 편지를 건네는 제스처, 함께 식탁에 앉는 시간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이 인터뷰는 두 전시 사이에 놓인 이러한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작가가 세계와 이미지,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다시 구성해 왔는지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1. 작가님의 작업에는 늘 ‘노동’이 중요한 층위로 등장해왔다. 《블랙홀》에서는 이미지 생산과 재현의 구조 속 노동이 드러났다면, 《휘슬러스》에서는 숨을 나누고 밥상을 차리는 행위가 또 다른 형태의 노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님에게 노동은 비판의 대상이기보다 관계를 구성하는 조건에 가까운 것인지, ‘노동’의 의미를 어떻게 접근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제가 처음 미술 제도 안의 노동에 대해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미술 작업과 전시가 작가 혼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생산된 이미지와 미술 작가를 둘러싼 신비화를 걷어내고, 미술 작업 역시 미술관 밖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생산 활동들처럼 구조적인 과정이며 다양한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저는 미술 산업 안팎의 노동자들, 그리고 이미지를 생산하고 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직업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주목했던 것은 노동과 직업이 한 사람의 서사와 역사를 설명해 줄 뿐 아니라, 작가인 저와 그들이 만나게 되는 계기로 작동하기도 하고, 미술 제도를 포함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 자체에 좀 더 초점을 두어 작업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미술 제도 안팎의 노동자들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저녁 장을 보거나 세탁을 하거나 소리를 만들거나 구두를 닦는 등 그들의 일에서 나타나는 동작들을 미술의 표현 형식 안으로 가져오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미술과 노동 사이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미술을 예술이라는 환상과 권위로부터 탈신비화하려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관습적인 미술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보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1. 《휘슬러스》에서는 탈성매매 여성 지원 단체 ‘윙’과의 만남을 통해 여성들의 우정과 숨, 밥상, 편지 같은 구체적인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미지와 사건의 틈을 드러내던 이전 작업에서, 실제 사람들과의 관계와 정서적 친밀함을 전면에 놓는 작업으로 이동하게 된 계기나 필요가 있었는지? 이 변화가 작가님 개인의 삶이나 글쓰기의 시간과도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이전 작업 보다 작업의 톤이 좀 더 친밀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위의 질문에서도 답했듯이 제 작업의 주제가 노동 자체라고 하기 보다 제가 미술 작업을 하면서 만나는 노동자들과 저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친밀함과 우정, 관계 맺기 같은 요소는 완전히 새롭게 추가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글쓰기는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가 글에서 늘 얘기하는 다정함과 연결성이 미술 작업에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더해서, 저와 제가 다루는 노동자나 인물 사이의 관계가 좀 더 관객의 것 (관객이 느끼는 친밀감과 연결성)으로 확장됐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에 작업의 톤이 부드러워진 것도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글을 쓰면서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고 싶다는 제 욕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글을 쓴 이후로, 글 뿐 아니라 제 미술 작업도 좀 더 마음의 영역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1. 두 전시 모두에서 ‘글쓰기’는 중요한 배경처럼 느껴진다. 《블랙홀》 시기의 글쓰기가 세계를 의심하고 분석하는 언어에 가까웠다면, 《휘슬러스》 이후의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편지나 시에 가까워진 듯 보이기도 한다. 작가님에게 글쓰기와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지 듣고 싶다.

 

글을 쓰면서 미술 작업과 분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글이 단순한 노동이었는데, 쓰다 보니 글은 제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표현 매체이고 세상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통로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제가 생각하는 미술의 성격에도 가깝기 때문에, 글과 미술을 따로 분리시키지 않고 서로 순환될 수 있는 작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1. 《휘슬러스》에서는 협업과 우정이 작업의 핵심 조건으로 등장합니다. 과거의 협업이 역할과 기능의 분담에 가까웠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신뢰와 정서적 친밀함이 더 전면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작가님에게 협업은 여전히 하나의 제작 방식인지, 아니면 세계를 이해하고 관계 맺는 하나의 태도에 가까운지, 작가님에게 ‘협업’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작업을 거듭하면서 협업이 관계 맺기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술 안팎에서 작업을 하면서 만난 분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저와 그분들이 만나서 같이 일을 하면서 서로 잘 되기를 바라는 한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다가왔습니다. 저에게 협업은 같이 일하는 분들 및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고, 제 작업에서 우정은 연결과 연대의 좀 더 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1. 휘파람을 이어 부는 숨, 손에 쥔 마음을 그린 <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비언어적, 정서적 형상들은 언어와 논리를 넘어서는 소통의 방식처럼 보인다. 과거 작업에서 언어와 서술, 구조적 비판이 중요했다면, 최근에는 몸짓과 감정, 다정함이 더 전면에 놓인 듯하다. 작가님에게 이러한 형식의 변화는 작업 태도의 전환이라기 보다 확장에 가까운 것인지, 혹은 전혀 다른 국면이라고 느끼시는지 궁금하다.

 

예전에도 퍼포머티브한 작업들을 해왔기 때문에, 이전 작업 보다 특별히 몸짓이 더 추가 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전 작업에서는 작업 속 인물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에 더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그 무게가 그 인물과 저의 관계로 조금 더 옮겨 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관계가 작업을 보는 관객들에게 까지 확장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좀 더 가깝게 서는 동작들과 다정함의 감정이 더 드러난 것 같기도 합니다.   

 

  1. 《휘슬러스》에서 숨을 나누는 행위, 손 편지, 함께 차린 밥상과 같은 장면들은 친밀함과 돌봄을 구체적인 형식으로 드러내는 요소처럼 보인다. 최근 작업에서 다정함이나 친밀함이 하나의 감정에 머무르기보다 관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오늘날 돌봄과 친밀함이 ‘노동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논의도 활발한데, 작가님에게 ‘돌본다’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정서에 가까운지, 아니면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태도에 가까운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의 교환과 유지가 작업 안에서 하나의 생산 행위 혹은 정서적 노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예술의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계신지도 듣고 싶다.

 

친척 어른 중에 혼자 사시는 치매 노인이 있어서, 가끔 돌봄을 하러 지방에 내려갑니다. 그분을 돌보면서 생각한 것은 돌봄은 친밀함과 인내를 요구하는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요양보호사 선생님에게 돌봄은 분명히 노동이지만, 돌봄 자체가 기계적인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친밀한 정서적 노력이 없다면 서로 힘들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돌봄은 단순히 경제적 노동이나 의도적인 의무라고 하기 보다, 사회적 관계와 책임을 실천 하는, 즉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우정을 느끼는 정서적인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돌본다’는 행위는 어느 한쪽으로만 설명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에서 출발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만나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제 작업에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작업을 완성하겠다고 같이 마음을 모으는 과정이 중요한데, 저는 그것을 단순히 조사나 기록이라고 하기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과정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돌봄도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행되는 태도인 것 같다고 느낍니다.

예술에서 돌봄을 주제로 가지고 온다면, 돌봄이라는 행위가 만들어 내는 더 다양한 어휘들과 확장된 가능성과 해석을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여러 가능성들에 존재들 사이의 넓고 복잡한 연결성과 그들이 공유하는 세계의 지속성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