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자리: 이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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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4일부터 11월 30일 갤러리조선에서 열리는 이윤이 개인전 《태양의 자리 Solar Grounds》는 익숙한 믿음의 형태, 혹은 신앙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여러 설치와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미술 공간이 정신적 교류의 장소가 될 수 있는가”를 탐구하고자 했다. 작품들은 신앙의 대체물로서가 아니라, 감각을 매개로 한 표현 형식으로서 전시장을 점유한다. 전시장에는 〈적녹백〉이란 이름으로, 스테인드 글라스 형상을 참고해서 제작한 세 점의 아크릴 판이 서있다. 전통적으로 하늘의 빛을 받아들이는 수직적 건축의 창이던 스테인드 글라스 형식은, 여기서 그 방향을 바꾼다. 그는 신안의 진흙과 바다의 염분, 갯벌의 흔적을 유리 위에 섞은 것처럼, 이 창문들은 더 이상 하늘을 향한 통로가 아니다. 마치 땅의 색, 바람의 염분, 바다의 입자들을 받아들인 것처럼, 성스러움의 방향을 하늘에서 땅으로 되돌리는 걸까.
이번 전시가 열리는 장소는 행인이 많은 동네 한가운데에 위치한 갤러리 조선의 지하 공간이다. 관람객은 깊숙이 이 공간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갈 때 햇빛을 더 강렬하게 맞이하게 될 것 같다.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교리적 이미지가 아닌, 무작위로 배열된 색채의 빛을 통해 초월적 경험을 다시 구성했던 것처럼, 이 전시에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의 형식은 교리를 비워낸 자리에 물질의 감각을 불러온다. 리히터는 “예술은 감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이며, 신을 찾는 종교적 탐구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윤이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 또한, 일종의 초월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감각과 물질을 통해 발견하려는 예술 창작 태도에 가깝다. 《태양의 자리》는 빛과 흙, 하늘과 땅, 관계와 교류가 서로의 표면에 닿고 섞이는 곳을 떠올리게 한다.
1.
우리가 바다, 태양, 소금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을까? 얼마나 조사하고 알고 머물고 돌봐야 말할 수 있을지해서, 문득 손길과 발길을 멈춘 적도 있다. 그럼에도 미술 공간은 우리에게 개인의 언어가 성립될 수 있는, 그리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잠시 안도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에 가깝기 때문에, 만들어온 작품들을 풀어 놓는다. 이곳은 아름다움, 윤리, 자유나 평등의 감각이 복원되는 자리이다. 마치 게오르그 짐멜이 ‘정신적 삶(Geistesleben)’ 논의를 통해 말하는, 즉 신앙을 위한 외부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건(devotion), 개인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가능한 무언가를 예술과 연결지을 수 있을까. 삶을 경건하게 감각하는 태도로 만든 예술 말이다. 이윤이 작가의 개인전 《태양의 자리 Solar Grounds》는 익숙한 믿음의 형태, 혹은 신앙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여러 설치와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미술 공간이 정신적 교류의 장소가 될 수 있는가”를 탐구하고자 했다. 작품들은 신앙의 대체물로서가 아니라, 감각을 매개로 한 표현 형식으로서 전시장을 점유한다. 전시장에는 〈적녹백〉이란 이름으로, 스테인드 글라스 형상을 참고해서 제작한 세 점의 아크릴 판이 서있다. 전통적으로 하늘의 빛을 받아들이는 수직적 건축의 창이던 스테인드 글라스 형식은, 여기서 그 방향을 바꾼다. 그는 신안의 진흙과 바다의 염분, 갯벌의 흔적을 유리 위에 섞은 것처럼, 이 창문들은 더 이상 하늘을 향한 통로가 아니다. 마치 땅의 색, 바람의 염분, 바다의 입자들을 받아들인 것처럼, 성스러움의 방향을 하늘에서 땅으로 되돌리는 걸까.
이번 전시가 열리는 장소는 행인이 많은 동네 한가운데에 위치한 갤러리 조선의 지하 공간이다. 관람객은 깊숙이 이 공간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갈 때 햇빛을 더 강렬하게 맞이하게 될 것 같다.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교리적 이미지가 아닌, 무작위로 배열된 색채의 빛을 통해 초월적 경험을 다시 구성했던 것처럼, 이 전시에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의 형식은 교리를 비워낸 자리에 물질의 감각을 불러온다. 리히터는 “예술은 감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이며, 신을 찾는 종교적 탐구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윤이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 또한, 일종의 초월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감각과 물질을 통해 발견하려는 예술 창작 태도에 가깝다. 《태양의 자리》는 빛과 흙, 하늘과 땅, 관계와 교류가 서로의 표면에 닿고 섞이는 곳을 떠올리게 한다.
2.
나는 종종 멀리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는 걸 즐긴다. 어딘가에 직접 가본 사람이 가져온 경험과 기록, 그로부터 파생된 감각과 언어를 듣는 일은 언제나 내게 한 장르처럼 여겨진다. 예술가를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도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제도이다. 예술가는 한 장소에 잠시 머물며, 사람과 풍경, 대화와 움직임을 기록한다. 이는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머무는 자의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좀 더 가깝다. 이윤이의 작업은 예술가의 레지던시, 즉 떠날 것을 전제한 체류 속에서 만들어졌다.
작가가 특정 장소에 머물며 카메라를 들고, 기록하는 것은 물질들과 시간, 관계의 양상이다. 완결되지 않은 여정 속에서 가까운 곳과 먼 곳을 오가며, 종종 국경을 넘나든다. 그 과정에서 남겨지는 것은 일시적으로 스쳐간 언어, 몸짓, 표정 같은 것들이다. 나는 이윤이의 작업을 보며, 이러한 종류의 교류 떠남과 머무름 사이에서 발생하는 활동들 를 하나의 장르, 혹은 표현 방법으로 이해한다. 한 장소에 ‘머무르는 것’은 어떤 가치의 교환이나 제도적 결과로 환원되지 않는다. 장소는 체험의 배경이 아니라 관계가 형성되는 접점이 된다.
이윤이 작가는 생태와 자연에 그리고 그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인물들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바깥 환경과 지역으로 직접 나가 사람들과 만나고, 카메라 앞에 서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 〈두 앵커 (퍼포먼스 기록)〉에서도 그렇지만, 때로 오브제를 만들어 착용하고, 거리에 나섰다. 그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관계 맺기의 방법이었다. 그의 작업에서 예술적 기록이란 곧 한 장소에 머물고 상호작용하는 방법 중 하나인 것 같다. 그가 친구들과 나눈 대화, 함께 걸은 길, 그 안에서 나눈 정서들은 모두 작업의 재료이자 결과로 남았다. 최근 몇 년간 제주, 신안, 해남 등지로 이어진 방문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긴 여정이 되고 있고, 올해 그가 다시 방문한 신안의 땅은 그의 작품에서 무엇보다 햇빛과 바람으로 소금을 얻는 생태적 순환의 장소이다.
영상 작품 〈파라클레토스〉에는 자연, 환경, 풍경, 퍼포먼스와 노동의 소재들이 등장한다. 신안 증도의 염전, 그물, 교회, 여름 성경 학교, 퍼포먼스, 워크숍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윤이의 촬영 혹은 편집 과정은 그것들을 단일한 내러티브로 묶지 않는다. 관찰적 장면과 상호작용적 장면이 섞이며, 때로는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가 삽입되기도 한다. 이는 주로 다큐멘터리 영역에서 논쟁하는 사실성의 규율에서 벗어나, 삶의 모호성과 불연속성을 반영하기 위한 장치다. 그는 대상에 몰입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3.
이번 전시 제작 과정을 곁에서 같이 하며, 이윤이의 창작 활동이 만남들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새삼 다시 발견했다. 그는 작품을 제작하기 전, 조사와 연구의 과정 못지 않게, 먼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의 작품 속에서, 혹은 설치 작업의 흔적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대화와 우정, 즉흥적 교류다. 이는 그의 작품 속 구체적 장소에서 대화와 행동의 수행으로 드러나고, 표시되고, 기억된다. 나는 이 장면들을 지켜보며, 예술을 둘러싼 공동체를 무목적적인 공동체/관계들로 연관지어 생각해 봤다.
작업 과정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들은 종종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서 함께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때로는 방향을 잃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과정의 본질을 드러낸다. 목표나 성취보다는 관계가 남는 과정, 말과 행동, 주저함과 망설임이 모두 기록되는 과정. 이윤이 작가의 작업에서 이러한 느슨한 공동체의 형태가 슬며시 생성되고, 기록되는 순간들이 있다. 영상 작품 속 인물들이 기도하고, 노래하고, 염전 위를 걷고, 바다 옆에 모인 장면들은 모두 느슨한 관계 짓기 퍼포먼스로 읽을 수 있다. 그 행위는 교리를 대체하는 언어로 볼 수 있고, 각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이 퍼포먼스들 그리고 이 기록이 누군가를 혹은 어떤 순간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의 작업은, 곁에 서있는 존재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낸다. 그것이 곧 예술의 의례이자 공동체의 형식이기도 하다. 관객도 작품 앞에 서면, 한 명의 참여자가 된다.
한편 ‘예술이 줄 수 있는 위안’을 구원에 빗댈 수 있을까. 종착지나 교리를 취하지 않는 종류의 구원. 서로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추고, 함께 바라보는 순간 속에서 미세하게 작동하는 것으로서의 구원. 그것은 실제로는 ‘철저히 주관적인 사실’로서의 위안으로 다가올 것이다. 믿음을 둘러싼 제도에서 벗어난 구원의 본질적 요소는, 개인의 감각 안으로 옮겨올 수 있을까. 예술은 구원을 말하기 전에 혹은 이를 말하면서, 현실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관계적 윤리를 맺으며, 현실에 감응하는 방법을 실행한다.
“이 전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서문을 받아서 제공하기보다는, ‘전시를 여는 에세이’라는 이름의 글로 전시 보는 관점 하나를 제안하는 방식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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