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schauhaus

Gallery Sagan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Ⅰ. 실내에 하나의 책상이 있다. 그 위에는 박스 형태의 건물 모형이 놓여져 있고, 그 옆에는 평범한 의자 위에 TV 모니터가 얹혀져 있다. 모니터의 화면에는 창문을 통해 모형 속을 살피는 사람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나타나거나 혹은 신체의 일부가 보인다.
이 장면들은 모두 건물의 모형 안에 장착된 소형 감시 카메라에 의해 찍힌 것이다. 그러니까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객들은 전시장 한 가운데에 있는 건물 모형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 안에 장착된 소형 감시 카메라가 이런 관객들의 모습을 촬영하여 그 옆에 있는 모니터로 전송한 것이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경험을 일상 속에서 종종 겪는 수가 있다. 텔레비전 수상기를 파는 상점에 들렀을 때,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던 경우가 그것이다. 모니터에 비친 우리의 영상은 근처에 설치된 비디오 카메라가 그 앞을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찍어 모니터로 전송한 것이다. 이 경우에 모니터의 화면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한 미디어는 비디오 카메라라고 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이다.
정정주의 작업은 이 비디오 카메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동영상을 이용한 기록매체인 비디오 카메라는 실시간에 특정한 상황을 모니터에 전송하거나 비디오 테이프에 기록함으로써 현장 증명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반복 시청과 건너뛰기, 그리고 정지 화면 등 다양한 작동이 가능한 비디오가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며, 이제는 독자적인 장르로 자리잡아 가는 형편이다.
그 뿐만 아니라 비디오 카메라는 이미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작동이 비교적 손쉬운 캠코더는 이제 일상 용품이 되었으며, 은행을 비롯하여 사무실, 주택 등의 요소 요소에 설치된 소형감시 카메라는 우리의 동작을 일일이 감시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등장하는 ‘대형(Big Brother)’의 존재처럼, 우리는 비디오라고 하는 문명의 산물에 의해 감시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도처에 깔린 감시 카메라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지만,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때로 카메라의 존재를 잊게 된다. 그래서 심약한 어떤 범법자는 TV 뉴스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수를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진다.

Ⅱ. 정정주의 비디오 작업은 관객과 특정한 건축물의 모델, 그리고 그것이 놓여져 있는 공간, 즉 하나의 환경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각과 그로 인한 관객의 심리적 반응에 주목한다. 그는 인간의 눈과 비디오 카메라의 유사성, 즉 보는 것과 기록하는 특성에 관심을 보인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하루에 육안을 통해서 보는 것은 약 16시간 동안의 비디오 카메라 작동에 해당된다고 한다. PAL방식 비디오의 프레임 수가 초당 25장의 그림에 해당된다고 할 때, 인간은 하루에 약 백 사십 사만 장의 그림을 보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눈과 카메라의 렌즈가 구조상 똑 같을 수만은 없다. 카메라의 렌즈가 대상의 일정한 영역을 사각의 프레임으로 절단하여 기록하는 반면, 인간의 눈은 열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시각장은 대상에 대한 인위적 절단이 불가능하며 연속돼 있다.
정정주의 비디오 작업은 눈의 지각을 통한 ‘낯선’ 미적 경험을 유발한다. 전시장이란 특정한 장소가 주는 의미가 이미 일상적 환경은 아니지만, 이 비일상적 환경은 소외의 충격을 강화하는 요인이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그 안에 설치된 건축물의 모형을 둘러보게 되며, 이윽고 그 주변에 놓여있는 모니터를 통해 모형 속을 기웃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원인을 추적하게 된 관객들은 건축물의 모형 속에 작은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카메라에 의해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내 인식하게 된다. 즉, 대상을 살펴보는 자신이 다른 대상에 의해 살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모니터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에서 ‘낯설음(소외)’의 충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정주의 작업은 이처럼 지각작용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관계, 즉 사물을 지각하는 주체와 지각(기록)을 당하는 피사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각의 현상학에 관계된다. 건축물의 모형은 작가가 생활대을 하는 실제 공간을 모델로 하여 구성된 것이다. 그곳, 모형의 내부에 좌우 120도로 회전할 수 있는 소형 감시 카메라가 장착돼 있다. 이 카메라는 모형에 붙은 유리문을 통해 피사체를 촬영한다. 호기심에 가득 차서 유리문을 통해 모형의 내부를 들여다보던 관객들은 이윽고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카메라는 또한 전후좌우의 운동을 하면서 모형의 내부와 외부, 즉 전시장의 광경을 시시각각으로 촬영하여 순간적으로 변하는 이미지들을 모니터로 전송한다. 이 때 감시 카메라는 구조상 대상의 영역을 절단하여 전송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전송된 동영상 이미지들은 모니터에 사각의 프레임 형태로 재현된다. 이 때 관객들이 바라보는 모니터상의 이미지는 대상의 영역 중에서 카메라의 렌즈에 포착된 영역이며, 그 밖의 이미지들은 모니터 상에서 증발되게 된다. 관객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니터상의 이미지를 바라보며 증발된 대상의 영역과 포착된 영역 사이를 이으려고 하는 의미부여의 노력을 하게 된다. 즉,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혹은 작가 자신의 말대로 ‘관찰하는 것’과 ‘관찰되어지는 것’의 상호작용을 통해 대상이 지닌 의미의 지평을 넓혀가고자 하는 것이다.

Ⅲ. 정정주의 작업에서 ‘빛’과 ‘공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정정주가 자신의 작업에서 설정한 공간은 사적으로 익숙한 공간들이다. 그것들은 작가가 직접 생활하는 공간들, 즉 거실이나 학생들을 위한 학교의 기숙사, 매점, 실내체육관 등이다. 그는 이러한 건축물들의 구조를 매우 단순한 형태로 재현하고 있지만, 실내의 소품들은 제거한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델 공간의 내부는 텅 비어있다. 나는 책상이나 책장, 옷장 등과 같은 가구들로 가득 찬 공간보다 비어있는 공간에 더욱 많은 흥미를 느낀다. 이사를 간 뒤 깨끗하게 비워진 방들, 새 주인을 기다리는 작은 상점 건물들, 텅 빈 체육관 그리고 예전에 호텔의 일부로 사용되었을 법한, 긴 복도와 창문이 있는 작은 방들.......이렇게 비워진 공간에 들어서면 평소에 느낄 수 없었던 공간 자체의 모습에 집중할 수가 있다. 벽과 천장, 창문과 출입문들의 크기와 위치에 의해 각각의 공간들은 스스로의 특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들은 그 공간들을 세포와도 같은 ‘유기적’인 생명체로 보이게 한다.”

여기서 작가가 건물의 공간 자체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은, 건물의 구조적 측면이나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주목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정정주의 건물 모형들은 단순한 외관의 기하학적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건축에 대한 그 자신의 오랜 탐구와도 관계가 깊다. 그는 ‘건축물들의 사회적, 심리적 그리고 구조적 특성’에 대해 연구하면서 건축의 미학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가령, 빛과 그 빛에 대한 공간의 탐구가 바로 그것이다. 1999년 작인, 긴 건물의 모형에 할로겐 전등을 천장에 장착하고 강한 불빛이 창문을 통해 새어나오도록 한 작품은 마치 야간열차를 연상시키는 듯한 강렬한 미적 환기력을 지니고 있다. 단순한 건물의 구조와 함께 빛이라는 본질적인 조형요소가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다.
정정주가 창조하는 공간은 사적인 경험에 뿌리박은 공간이다. 그의 작업에서 개인적인 경험은 그만큼 의미하는 바가 크다.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겪었던 사적인 공간(교회의 사택)에 관련된 추억들, 그것의 특수한 공간적 구조에서 겪었던 경험이 오늘날 정정주 작업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의 렌즈가 대상 영역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 없듯이, 또한 우리의 기억이 대상의 모든 정보를 다 재현할 수 없듯이, 공간에 대한 정정주의 추억은 하나의 엑기스로 정련되어 절제된 미감을 창출하고 있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감시하는 것’과 ‘감시당하는 것’ 사이의 교차점에서 그의 ‘interactive(상호작용)’ 전략은 더욱 의미를 키워가게 될 것이다.

February 20, 2024